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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다가가는 남성열전]누드화 속의 여인

81. 피에르 오그스트 르느와르(1841~1919)

2013-02-19     이재명 기자
▲ 삽화=화가 박종민

누드화(nude畵) 속의 여인들, 그들의 영혼이 보는 사람을 흔들어 놓는다. 관능적인 자태와 매력이 선명하다

르느와르는 여성의 육체는 무엇인가를 고뇌한 예술가이다. 창조적 모태로서의 상징적 의미 외에 여성의 몸짓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전달하려 애썼다.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누드는 에로티시즘만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아름다운 육체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신성하다고 했다.



일요일 아침, 동네 주택가 목욕탕에서 참으로 신선한, 아름다운 비너스를 만난다.

참으로 인간의 몸은 신이 만든 걸작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한참 물이 오른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몸이 이처럼 아름다움의 절정에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마 그들은 갓 스물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르느와르의 그림 속에서 보던 그런 여인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매를, 미학을 공부한 사람이 뚫어지게 본다는 것도 그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몇 천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온 이상 같은 여성끼리는 그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니까 자연스럽게 보든, 훔쳐보든 관계치 않는 것이 목욕탕 룰이니까.



목욕탕에서의 젊은 여성의 누드는 전적으로 에로틱하지도 않고 경건하다.

그런 아름다움을 르느와르는 유려하고 거침없이 숙련된 드로잉의 선율로 나타내었다.

그의 풍부한 감각을 통하여 그린 누드는 우리들에게 그 어디에서나 생명성과 여성성이 있을 뿐, 섹슈얼한 느낌이나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아하다.

수밀도처럼 익은 가슴을 안은 여린 여성들은 얼른 씻고 나가버리고 왁자한 입담을 과시하는 여인들은 늘어지게 시간을 잡고 있다.



다시 르느와르의 화집을 찬찬히 보면 여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버린다. 그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고유의 회화미로 표현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누드 그림 속에는 항상 강렬한 색채와 꽃이 더욱 여성성을 강조한다.

그는 언제나 가슴이나 허리를 애무하고 싶어지는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으며, 선입관이나 감상을 떠나 누드라는 대상은 그의 화풍의 정신이자 영혼이었다.

그의 관능적인 누드 속에는 생명의 노래가 살아있고, 인간적인 훈훈함과 따뜻함이 녹아있다.

결코 음탕한 누드의 자태는 아니다. 몸짓이나 대화, 육체적인 향락이 쾌감으로 달아오른 유혹적인 얼굴은 더욱 아니다.

인간 삶으로서의 순수한 누드, 여인들이 가슴에 담아 두고 있는 순결하고 단아함이 풍기는 그런 누드화이다. 르느와르 그는 그런 그림을 그렸다.



오늘날 우리는 미술의 역사 속에 남겨진 누드의 예술성과 가치에 주목한다. 거기서 새삼 우리는 미술사에서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누드라는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여성의 육체는 과연 무엇일까.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고 길들여진다고도 하였지만 그건 아니다.

여인은 바다의 파도 속에서 탄생한 비너스이거나, 침대에서 막 나온 그녀일지라도 여성의 육체는 예술의 대상이기 이전에 생명의 모태이며, 천지 창조의 주체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여인들을 오늘도 동네 목욕탕에서 가까이 실물로 만난다. 애기를 낳고 헌집으로 남아있는 여인이나, 앞으로 귀한 생명을 잉태할 비너스이든 간에 여성의 몸은 신비하고도 성스러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여성은, 여성의 몸을 통하여 생명을 창조하는 기적을 실천한다. 지구상에 이보다 더 거룩한 일이 더는 없을 것이니까.

르느와르의 그림 속 여인들은 그런 무심한 순간들에 행복해 하고, 더욱이 화가는 그 순간에 빛을 투영하여 빛나는 환희의 순간으로 거듭 느끼게 하는 것이리라 생각해 본다.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