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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다가가는 남성열전]백정(白丁)은 인간이 아니더냐

84.박서양(1885~1940)

2013-04-09     이재명 기자
▲ 삽화= 화가 박종민

바람이 불어도 차갑지 않아서 안길만하다. 봄바람이다. 사월의 햇빛은 은빛으로 출렁이고 꽃보다 더 눈부신 연초록의 물결이 여심(女心)을 향해 점령해 온다.

긴 어둠의 겨울을 뚫고 봄을 여는 태화강 물굽이는 낮은 산굽이를 돌아 천년세월을 안고 흐른다.

봄이다. 어제 내린 봄비는 우리가 사는 이 땅 울산을 골고루 적셔주고 있다.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이 땅 위에 생명있는 모두에게 봄비가 왔다. 봄이 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이고 희망이다. 아무리 서러워도 봄은 오는 것이니까. 살아있음의 기쁨에 눈물 흘린다.

자연은 이토록 만인에게 평등하건만 사람살이, 인간사회는 그렇지가 않다. 더구나 조선 500년 동안 조선팔천(朝鮮八賤)이란 게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백정(白丁)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이었으니 그 설움이 어떠했겠는가.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이고자 하지만 인간일 수 없는 천민(賤民)이라면 서럽지 않을 수 있으랴.

국민의 의무인 조세나 군역, 부역에서도 제외되고 노비들도 다 기재되는 호적도 없었던 백정이었다. 물론 호패도 발급되지 않았으며, 백정마을은 일반인이 출입하기 어려운 특수구역이었다. 일반인과 통혼하지도 못했다.

백정의 집은 기와를 올릴 수도 없었고 명주옷, 갓, 망건, 탕건, 가죽신 같은 것은 물론 착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백정은 외출 시 봉두난발에 패랭이를 쓸 뿐이었다. 초상을 당해도 상여를 쓸 수 없었고, 혼인식 날에도 말이나 가마를 쓸 수가 없었다. 남자는 상투를 묶지 못했으며 여자는 쪽을 찔 수도 없었다. 누구나 연령에 관계없이 백정에게는 반말을 썼다.



어린 시절 소근개(小近戌-개새끼)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박서양은 백정 아비의 아들로 태어나, 날 때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며 살아야 하는 팔자 백정이었다. 소나 돼지를 잡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었던 백정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학교나 교회에서도 함께 수업을 받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고, 민적(民籍)에 올릴 때는 이름 앞에 ‘붉은 점’ 등으로 표시하였고, 입학원서나 관공서 서류에도 반드시 백정이라 표시하도록 했다.

당시 백정 박성춘은 장티푸스에 걸린 자신을 낫게 해준 서양의 의사 에비슨에게 의학당에서 자신의 아들이 제발 공부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에비슨은 백정의 아들 박서양(소근개)에게 온갖 궂은 일을 시켜 그의 됨됨이를 지켜보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묵묵히 시키는 일을 모두 해내는 어린 백정 소근개에게 에비슨 역시 마음을 열었다. 에비슨은 온 나라에 유행하는 콜레라를 잠재우는데 큰 공을 세워 고종황제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에비슨은 뭐든 원하는 것을 말해 보라는 고종에게 “백정(白丁)도 의원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말했고 고종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때 마침 당시 진주에서 도살업에 종사하는 천민들이 형평사를 설립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구성해 천민 층의 신분해방운동을 벌인 역사적 사건, 형평(衡平)운동이 일어났다.

박서양은 백정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핍박과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에비슨의 주선으로 그는 진정한 의사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갔다. 그는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백정에서 의사로, 또 그에 그치지 않고, 그는 진정한 교육자였으며, 독립운동가였다. 갑오개혁, 을사조약 등 당시 소용돌이의 역사 속에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산 박서양의 일대기가 눈물겹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면서 존경을 받았던 박서양은 당당히 그 이름이 백정이 아닌, 한국 최초 서양의(西洋醫)로 남았다.

부는 바람에 꽃잎이 흩날린다. 지지 않는 꽃은 꽃이 아니지. 서러움 없는 세월만이라면 인생이 아닐테지…. 길을 나선다. 바람이 부는 날.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