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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다가가는 남성열전]모란이 피고 진다

85. 굴원(屈原)

2013-04-23     이재명 기자
▲ 삽화= 화가 박종민

시작도 끝도 없는 허정(虛靜)의 상태가 고도(高度)의 철학적 사유의 세계라면, 떨어지는 봄비를 피해 잠시 몸을 숨기고 있는 한 순간이야말로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세계이다.

아름다운 여인은 빨리 시들어 버리고 화려한 꽃은 여러 날 피지 않는다. 나의 좁은 뜨락에는 수 십 송이의 목단(牧丹)이 피었다가 지고 있다.

하늘이 높고 땅이 두꺼운 줄 모르던 젊은 시절의 영기(英氣)는 이미 사라지고,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이 향기가 되어 가슴을 적시고 애잔한 그리움이 일렁인다. 올해도 벌써 모란이 피고 진다.

젖먹이 아이들이 딸린 어머니가 지나치게 단장을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잡초가 뜰을 덮어도 내버려둔다.

완벽한 절정이나 아름다운 긴장도 놓아 버린다. 풍치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곳에서는 집을 지으려 하지 않는 것처럼. 너무 떠벌리거나 지나치게 손질을 해 놓으면 사람이 도리어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사람과 미(美)의 관계는 이렇듯 미묘한 법이다.

다정다감해서 너무 일찍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사람과 같이, 역사에서 다정다감은 인생의 짐을 더 무겁게 해주고 인생의 상전벽해감을 더 크게 불러일으킨다. 이런 연유로 역사 속에서 헤맬 때 우리는 보다 늘어만 가는 인생의 회상에 잠긴다.



장강을 따라 세 협곡을 잇는 산샤(三峽)댐의 수몰지역 중에 중국에서 가장 청렴한 선비 시인이었던 굴원의 고향 즈구이가 포함되어 있어 안타깝다.

굴원, 그는 엄격하고 고상한 기품, 간결하면서도 장중함과 담백하고 수려함이 초나라 회왕의 신임을 얻는 반면, 너무 일찍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신하들과 귀족들의 미움까지도 한 몸으로 받았다.

비범한 재능과 정치적 성과들로 회왕의 신임을 독차지했던 그였지만 역사는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굴원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귀족이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을 당해 귀양살이를 하던 중, 초나라가 진나라에 멸망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멱라강에 뛰어 들어 자살을 했다. 그가 강물에 몸을 던진 그 날이 바로 기원전 278년 음력 5월 초닷새였다. 중국사람들은 이 애국시인 굴원을 추모하기 위해서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면, 찰밥에 고기를 섞어 창포에 찐 종자를 먹고 용선 경기를 하는 풍속이 생겼다. 용선 경기는 멱라강에 빠진 굴원을 구하기 위한 것이고 강에 종자를 던지는 것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어 굴원의 육신을 보호하자는 의미였다.

온갖 협잡이 난무하는 정치현실에서 배척당한 굴원은 ‘어부사(漁父辭)’에서 “온 세상이 혼탁하나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취해 있으나 나 홀로 깨어 있었다.”고 탄식하면서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몸을 던졌다.



침묵에 잠겼던 대지(大地)도 큰 그릇의 문인이 찾아오면, 그 동안 꼭 가두고 있던 문화의 내면을 확 펼쳐 보인다.

대자연은 문인으로 하여금 붓을 들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한다. 이럴 때 써낸 글들은 그 무슨 통일된 품격도 없고, 확정된 체제도 없는 기괴한 문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한다. 그러면서도 보다 더 세련되고 박력이 있다. 이런 것들은 이전에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글이다. 시들어 유약하던 문인도 이 거센 역사의 파도에 휘감긴다면 적어도 천 여 년쯤은 탄토(呑吐)하게도 될 것이다.

명작(名作)은 시공과 현재와 과거를 뛰어 넘는다. 역사는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고 때로는 우리에게 무엇이 불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한가를 가르쳐준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멱라강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신한 초나라 굴원의 넋이 깃든 곳, 동정호를 둘러서 악양시와 장사시 사이에 있는 굴원 유적지 멱라강을 답사했던 적이 있다.

흐르는 강줄기만 바라보았던 그 때도 모란이 피었다 지는 계절이었다.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