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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이예, 그 불멸의 길]26. 그것은 길이었다 <177>

글 이충호 그림 이상열

2013-06-11     이재명 기자
숙로들도 처형의 대상이 되었다. 이세 슈고 토끼 모찌요리와 와까사의 슈고 잇시끼 요시쯔라가아가 요시노리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언제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이러한 위협과 공포에 숙로들은 몸을 떨었다.

술을 따르는 것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쇼나곤 국의 시녀를 매질하고, 삭발시켜 비구니가 되게 하였는가 하면 자신에게 설교하려고 한 승려를 끓는 솥에 머리부터 담가 두 번 다시 말할 수 없도록 혀를 잘라냈던 일화가 말해주듯 요시노리는 만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적도 많았다. 그의 개죽음은 자신이 행한 공포정치의 자업자득이었는지 모른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느낀 하리마의 슈고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선수를 쳐서 요시노리를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열고 목을 벤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변란의 과정에서 조선의 우군인 오우치 모치요도 함께 변을 당한 것이었다. 오우치 모치요를 잃은 것은 조선 조정으로선 크나큰 손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우치 모치요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예는 너무나 애석하여 땅을 치며 탄식했다.

“대마도는 신라의 땅이었고 고려 선종 때 이후로는 대마도주에게 대마도당관(對馬島當官)이라는 관직과 만호(萬戶)라는 무관직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원래 상국(조선)의 목마지(牧馬地)였던 대마도를 상국(조선)에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선친의 뜻이었고 또한 소인의 뜻이옵니다. 상국에서 힘이 필요할 때 언제나 돕도록 하겠습니다.”

부젠(豊前), 이지미, 기이, 스오 나가토, 이와미의 6개 쿠니(國)을 다스리던 오우치 모치요가 큐슈에서 소이전의 세력을 밀어내고 치쿠젠의 슈고까지 맡고나서 이예에게 했던 말이다. 늘 조선 조정에 우호적이었던 그를 생각할 때 이예는 마치 나라의 백만 우군을 잃은 것 같아서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조정에선 논의 끝에 세종 24년(1442년) 12월 16일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요시노리 국왕(쇼군)의 죽음을 조문하고 장남 아시카가 요시까와(足利義勝)가 새 국왕에 즉위한 것을 하례하기 위해서였다.

첨지중추원사 변효문을 정사로 윤인보를 부사,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세종 25년(1443년) 계해년 2월 21일 이들이 교토 어소에 파견되었다.

변효문 일행이 통신사로 떠나는 그날도 조정은 최완의 문제로 시끄러웠다.

전년도 10월 전라도 여도 천호 최완이 전라도 금음모도의 동면 우아포에서 고기잡이를 하러 들어온 왜인 11명의 목을 벤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에 대한 잘잘못을 놓고 이어져온 논쟁이 그날도 계속되었다.

최완은 그 사건이 있기 불과 두 달 전에는 왜선 4척이 개도에서 이로도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뒤쫓아 가서 38명을 사로잡는 공과를 기록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문인(文引)을 가지고 있는 어부들을 왜구로 오인하여 죽인 것이었다. 일부 대신들은 그가 공명심 때문에 문인을 가지고 있는 왜인을 죽였다고 추핵해왔다.

그 논쟁은 마침내 최완을 참형에 처하기로 결정하고 마무리 되었다. 형조에선 최완을 김해부로 송치하여 사형집행을 기다리게 했다. 그런데 바로 시기에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