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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이예, 그 불멸의 길]29. 아들에게 쓰는 편지 <186>

글 이충호 그림 이상열

2013-06-24     이재명 기자
나는 그것을 길이라 생각했다. 길은 누구에겐가 가야하고 누구에게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길의 뜻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길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왜구의 소굴에 끌려가서 뼈가 부스러지도록 고통을 당하며 밤 새워 신음을 토하던 그날 밤에도,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나 저승의 문 앞까지 쓸려갔던 그 순간에도 나는 길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길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과 만났다. 일국의 국왕도 적소(賊巢)의 도적떼도 다 그 길 위에서 만났다. 서슬 퍼런 시간의 곁에서 나는 보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그 잔혹함을, 인간이 인간을 죽여 위업을 삼고 그 피로써 역사를 만드는 것을 나는 수없이 목도하였다. 수많은 목숨의 피로써 그들의 보좌는 더욱 굳건할 것이며 그들의 칼은 더 서슬 퍼렇게 빛나겠지만 그것이 진정 인간의 길은 아닐 것이다.

왜구가 사람을 죽이고 아녀자를 겁탈하여 온갖 것을 약탈해 가는 밤 세상은 아비규환과 다르지 않았다. 그 절망 같은 시간의 곁에서 나는 나라가 무엇이고 그 백성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나라가 있어도 백성의 울이 되지 못한 채 백성이 맨몸으로 유린당하는 참혹한 시간의 한 가운데서도 관리들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몸을 도사린다면 그 백성은 진정 누구를 믿고 어디로 가야 하겠느냐.

왜구들이 죽인 사람들의 시신이 역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는 통탄할 그 바닥에서도 일부 간악한 관리들은 후안무치로 현란한 혀의 몸뚱이를 놀려 충(忠)을 말하고 위민보국을 말하였다. 내가 이 나라의 관리로서 진정 이 백성을 위해서 죽지 않는데 내가 어찌 충을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충은 나를 바치는 근간이며 이 나라 만백성의 아픈 마디마디를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 것이거늘, 위민 없는 보국이 어디 있으며 보국이 없는 위민이 어디 있겠느냐. 말이 현란할수록 그 진실은 허할 것이며 충도 그 중심이 공허할 것이다.

아비들아, 너희도 이 나라의 관리의 소임을 맡고 일편이나마 나라에 기여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을 버려라. 너희의 가슴에 사욕의 뿌리가 엉켜 있는데 보국의 나무, 위민의 나무가 자라겠느냐. 너희의 눈이 권력과 부귀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데 백성의 안위가 어떻게 눈에 보이겠느냐. 너희의 눈에는 오직 권력과 부귀의 근간만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아범(이종근(李宗根), 양근(楊根·지금의 양평)군수)아, 목민관의 길이 무엇인가를, 진정한 충의 근간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 길이 어찌 진정한 충의 길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민(民)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민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진정한 목민관의 자리라 말할 수 있겠느냐.

배고픔에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없는가,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은 없는가, 권리가 빼앗기거나 부당하게 짓눌린 사람은 없는가를 살피고 또 살펴야 하는 것이 목민관의 일이며, 민이 잠잘 때도 깨어서 그들의 안위를 보살펴야 하는 것이 또한 목민관의 길일 것이다. 한 나라의 힘이든 일개 필부의 힘이든 힘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한 가정의 힘은 그 가솔에게서 나오고 한 나라의 힘은 그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느냐. 민이 튼튼하지 못한데 나라가 튼튼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