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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이예, 그 불멸의 길]30. 모두 죽이지는 마소서 <189·끝>

글 이충호 그림 이상열

2013-06-27     이재명 기자
이예는 아쉬웠다.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뢰었다. 대신들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임금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이예는 어전에서 물러났다.

며칠 뒤 2월 초하루엔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바람 한 점 없이 하늘은 고요했고 그 고요한 하늘에서 펑펑 눈이 쏟아졌다. 그 다음날도 가늘게 눈발은 날렸다. 온 천지는 온통 하얀 눈으로 가득했다. 그 눈 속에서 산천은 으스스 몸을 떨었다.

쉰일곱 명의 왜적을 태운 여섯 대의 함거가 의금부를 출발했다.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끌려온 실라입라를 제외한 대마도에서 잡아온 실라 사야문 등 12명과 제주도에서 잡아온 소애 등 45명 도합 57명을 북경으로 압송하기 위해서였다.

도성 문 앞에는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신개, 예조판서 김종서 등 많은 대신들이 나와서 죄인들이 압송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예도 대신들 사이에 서서 끌려가는 왜인들을 지켜 보았다. 이예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미 이 사건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다하였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사건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았다.

‘전하, 이제는 명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할 준비를 하셔야 할 때입니다. 지나친 섬김은 언젠가 이 나라 사직에 독이 되어 돌아올지 모릅니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결코 명나라가 아니옵니다. 지나치게 명나라에 의존하고 모든 것을 사대의 관점에서 해결하려는 대신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죄인들은 우리가 치죄하여야 옳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어쩌면 그것은 명나라가 바라고 있는 바인지도 모릅니다. 전하, 비록 저들이 명나라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백성에게 죄를 지은 저들을 우리가 치죄하지 아니 하고 명으로 보낸다는 것은 결코 올바른 길은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가야할 길은 정녕 아닐 것입니다.’

이예의 생각은 말이 되지 못했다. 마음 속에서 맴돌던 생각들은 눈발이 되어 내렸다. 봉두난발 내리는 눈발만큼이나 마음의 눈발도 어지러웠다. 날리는 눈발 속에 손발이 묶인 채 실려 가는 왜적의 무리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보여 이예는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에필로그>세종 27년(1445년) 2월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북악의 골짜기를 몰아쳐온 바람이 매화나무의 잔가지를 흔들어대던 저녁 공(公)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40여 성상 동안 온몸을 던져왔던 보국위민의 그 위대한 길은 지는 해와 함께 끝났다. 향년 73세였다.

체찰사로 대마도에 가서 왜적들을 체포하고 계해약조 체결을 성사시키고 돌아온 지 1년 3개월 만이었다. 순조 1년(1910년) 충숙공(忠肅公) 시호를 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정2품)으로 추증되었다.

슬하에 종근(宗根) 종실(宗實) 두 아들이 있었다. 종근은 양근(楊根, 지금의 양평)군수, 문의현령(文義縣令)를 지냈고, 종실은 세조 때 대일 통신사로 사행중 풍랑을 만나 순국하였고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