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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읽는 세계명화](79) 라울 하우스만의 ‘비평가’

파편화된 현실, 회화적 재구성

2014-02-25     이재명 기자
▲ <비평가> 판지에 콜라주, 1919년, 베를린갤러리 .

서구 유럽 작가들의 표현력은 우리나라의 작가들보다 훨씬 자유롭게 보인다. 그들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특성이지만 현대미술의 흐름으로 본다면 자기부정과 파괴에서 출발하는 성찰의 시기를 겪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마치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몸부림과 혼란을 겪은 후의 큰 변화와 성장과 같은 경우라 하겠다. 곧 다다이즘(Dadaism)이다.

다다이즘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시작되었다. 혼란한 사회현상과 함께 나타난 문화현상으로서 미술과 음악, 문학 등 유럽예술의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 사전적 의미로는 기존의 논리와 질서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다. 기존의 예술에 대한 존재논리와 사회적 가치, 창작형식. 나아가 재료의 메커니즘까지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보수적인 아카데믹한 관점에서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면서도 비심미적이고 비도덕적인 위험한 현상이자 예술운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를 이끄는 현대의 예술과 현대미술의 정신은 여기에서 큰 도약을 한다. 기존의 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는 만들어 지지 않은 혼란한 시간을 맞이하면서도, 현대의 연구자들이 말하는 근대적인, 혹은 기존의 예술이 종말을 맞이하는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다이즘의 이러한 양상에서 그들의 정신을 유독 잘 드러내는 방식중의 하나로 선택된 것이 콜라주였다. 콜라주는 기존의 표현재료였던 캔버스와 붓, 물감 등을 배제하고 두터운 판지위에 신문이나 잡지를 오려서 풀로 붙이는 작업이다. 당시의 작가들은 “늙은 회화와의 결투를 신청하는데 가장 적합한 혁신적인 수법이다”라며 즐겨 활용을 했다.

예시된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1886~1971)의 작품을 살펴보면 모두 신문이나 잡지를 오려서 재구성을 한 작품이다. ‘비평가’라는 제목에서 이 사람의 정체성을 알 수 있지만 활용한 모든 형상은 물감과 같은 전통적인 재료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장난끼 많은 아이들의 미술수업 과제물과 같은 느낌이지만 무엇보다 품격 있는 예술의 면모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 곽영화 화가·칼럼니스트

그러나 좀 더 생각을 해본다면 신문에 게재되는 얼굴과 각종 기사는 모두 사회의 이슈가 되는 사람과 내용들이다. 그들이 사회의 지배적인 비중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들의 논리는 사회를 이끄는 중심적인 논리이기도 하다. 다다이즘의 작가들은 이러한 사회의 지배구조와 논리를 코믹하게 비웃으며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작가들의 작품을 비평하는 비평가는 방송과 언론, 그리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작가와 작품을 평하면서 소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논리는 매우 정교하고 철학적이지만 한편으로 작가와 작품을 비평한다는 구실을 통해서 오히려 작품과 작가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본질로부터 멀어진 주객전도의 우스꽝스러운 사회현상을 하우스만은 콜라주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곧 복잡하게 엉켜서 가려진 사회의 지배구조를 선명하고도 명료하게 재구성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유럽작가들의 이와 같은 대담하고도 내밀한 자유로운 비판정신은 끝없는 성찰에 의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지기에 우리와 비교한다면 중요한 타산지석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