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카지노

[연재소설(359)-海帝어둔] 10. 에도 담판 <13>

글 김하기 그림 박상호

2014-12-04     이재명 기자
도쿠가와의 어머니 오타마노가타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아들아, 박어둔 태수의 말을 듣도록 해라. 원래 우리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태조 이에야스님은 조선을 사부의 나라로 삼고, 결코 이익을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

오타마노가타의 말은 근거가 있었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우호와 선린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갓 태어난 도쿠가와 막부가 조선과 명청에 의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조선이 요구한 조선왕릉 도굴범과 전쟁포로들을 돌려주고 조선과 평화조약을 맺었으며, 그의 부인을 조선인 여자 포로인 이양녀에게 맡겨 정절을 배우도록 했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4년 뒤인 1606년에 조선왕릉 도굴범을 보내라는 것은 사실 억지에 가까웠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한양에 있던 선릉과 정릉이 왜적들에 의해 파헤쳐졌다.

1593년(선조26) 4월 경기감사 성영(成泳)의 치계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성룡은 양영대군의 후손인 이홍국을 시켜 그 사실을 조사하게 했다. 왕조국가에서 왕릉이 적에게 파헤쳐졌다고 하는 것은 큰 수치이며 큰 모욕이었다. 조사한 결과 이흥국이 가보니 두 능의 재궁(梓宮)은 불타버려 재만 조금 남아 있었고, 중종의 시체는 재궁이 불타기 전 송산에 옮겨져 있는 것을 능에 다시 묻고 1593년(선조26) 8월15일에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외교문제로 남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자 일본은 조선과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임진년 초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도굴범을 먼저 잡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14년 전의 도굴범을 일본으로서도 잡을 길이 없었다. 조선과 국교는 재개해야겠고 도굴범은 잡을 수 없고, 결국 일본은 궁여지책으로 37세 된 마고사구(痲古沙九)와 마다화지(麻多化之)라는 두 왜인 사형수를 도굴범이라며 잡아 보냈다.

마고사구는 37세, 다마화지는 27세였는데 모두 능을 도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마고사구는 부산 선소(船所)까지만 갔지 서울에는 간적도 없다고 했고, 마다화지는 아예 조선 땅에 온 적도 없다고 밝혔다. 선릉과 정릉의 도굴은 1592년의 일이고 두 왜인이 조선으로 끌려온 것은 1606년이었다.

그렇다면 1592년에 마다화지의 나이는 고작 13살에 불과했다. 그 나이로는 참전해 왕릉을 도굴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으나 조정 신료 중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도굴범이라는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여러 차례 엄한 국문을 가했다. 두 왜인들이 끝까지 자백하지 않자 이들의 처리를 두고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논의 끝에 도굴범의 진위를 밝히는 것보다 도쿠가와의 성의를 받아들여 일본과 국교와 통상을 재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마고사구와 마다화지를 왕릉을 훼손한 도굴범이라고 공포하고 두 왜인을 저잣거리에서 목을 베어 장대에 높이 달았다.

마고사고와 마다화지, 두 왜인을 처형하고 한 달 뒤 조선은 대규모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