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374)-海帝어둔] 10. 왕과 해제의 만남 <13>
글 김하기 그림 박상호
2014-12-25 이재명 기자
돌이켜보면 남구만 어사의 명으로 시작한 울릉도의 쇄환과 탐사가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남구만 어사가 당시 울진현감인 자신에게 지어준 시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박어둔은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울릉도와 자산도(독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남구만 어사로부터 울릉도 수토와 탐사의 명령을 받고 울산호로 출항을 한 것이 바다생활의 첫 계기가 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과 일본을 떠돌며 어느덧 3년의 해상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남구만의 변론은 계속 이어졌다.
“마마, 박어둔은 저의 명에 의해 울릉도 남항과 서항에 불법으로 막사를 짓고 어채(魚採)를 하는 왜인들을 토벌하고, 울릉도에 들어가 울릉도 섬 일대를 조사했습니다. 저는 삼년 전 박어둔이 울릉도에 가서 탐사한 결과를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남구만은 준비해온 두루마리를 펴서 읽었다.
‘울릉도는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은 섬입니다. 물고기와 전복이 풍부하고, 대나무와 인삼이 잘 자라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조선조정의 엄격한 방금(防禁)에도 불구하고 삼척, 울진, 울산, 동래, 견내량(거제), 거문도, 진도 등 동남해 사람들이 울릉도 서항에 막사를 짓고 활발한 어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부역이나 지은 죄를 피하기 위해 육지에서 도망친 자들이나 대부분은 고기를 잡는 해척과 선량한 양민들입니다. 그러므로 두 섬에 대한 방금을 풀고 세종대왕이 실시한 사민정책을 펼쳐 육지의 사람을 그곳에 이주시켜야 합니다.
국방의 용도로 봐서도 우산도와 자산도는 동해의 한가운데 있어, 바다를 지배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동·서·남·북으로 각각 50여 리 연해의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또 선척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습니다. 청컨대 육지에서 인민을 모집하여 섬을 채우고, 그곳에 만호와 수령을 두게 되면 왜적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며 실로 조선의 동쪽을 안전하게 지키는 장구지책이 될 것입니다.’
남구만은 박어둔이 울릉도를 탐사하고 작성한 두루마리 보고서를 읽은 뒤 숙종에게 말했다.
“상감마마, 박어둔과 안용복은 그냥 단순한 해척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왕토와 국방을 지키려 한 충신보국의 인물입니다. 이들을 죄인으로 다루기보다 오히려 상을 주고 격려해야 할 자로 생각하옵니다.”
그러자 영의정 민암이 목소리를 높였다.
“상감마마, 아니 되옵니다. 대명률이 엄연히 살아 있는 한 저 둘은 대역죄인입니다. 더욱이 단순한 해척인 주제에 함부로 태수와 감세관으로 사칭하고 일본으로 무단 도해하여 국기를 문란케 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엄히 다스려 다시는 이런 무리들이 일어나 바다의 질서를 문란케 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숙종은 이제 장희빈 일족인 민암에 대해서도 염오를 느꼈다. 그는 새로운 환국(換局,정국을 바꿈)을 작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