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카지노

[안준호의 세상읽기(25)]은퇴 후 과제, 돈·건강·외로움

빈곤만 면하면 돈의 힘은 세지 않아
관조적 긴 자유시간도 충분히 멋진 삶
‘할일 없으니 산에’ 경박한 인식 우려

2019-02-14     정명숙 기자
▲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이제 50대 후반인 매부가 30년간 근무해온 회사에서 작년에 퇴직했다. 소식을 듣고 당장 축하한다고 말하려다 머뭇거렸다. 이 나이 은퇴가 어떤 의미일까? 매부의 입사 초기 모습이 떠오른다. 한 동안 게임도 즐기고 고상하게 난을 키우기도 했지. 그러나 회사가 어떤 곳이던가? 바쁜 직장에서 취미는 언감생심, 오로지 업무에 충실하며 일과 체력단련만 병행해왔다. 긴 세월 신중함과 책임감이 몸에 배었고, 과묵하지만 언제나 밝은 표정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하면 운전대를 놓지 않고 전대를 허리에 차고는 충실한 가이드 역할을 맡곤 했다.

이번 설날 서울 여동생 집에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모였다. 그런데 매부가 달라졌다. 평소 요리 경험도 없는데 앞치마를 입고 양념에 재워둔 두꺼운 고기를 나눠 굽는다. 영 어설퍼보여서 해본 적 있냐고 물으니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로 처음 해본단다. 온 가족의 명절 주 요리를 사전 연습 없이 하는 허술함. 우려와 달리 맛있게 구운 고기 앞에서 매부가 알약을 하나 권한다. 일단 삼키고 물어보니 히말라야에서 왔다는 술 깨는 약이란다. 헉, 의사에게 정체불명의 약을 당당히 권하는 과감함. 조금씩 취하면서 새로운 취미에서 학생 시절 일탈 경험까지 거리낌 없이 털어 놓는 솔직함까지.

허술함과 과감함과 솔직함을 젊음의 특권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요즘 입시경쟁과 청년 취업난 앞에서 어느 젊은이가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을까? 진정한 자유는 은퇴 후에 온다. 직장은 자기실현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많은 직장인들이 업무 압박과 성과 욕심에 짓눌려 지내다가 갑작스런 은퇴를 맞는다. 그제야 평가받는 삶에서 벗어나 굳어진 근육을 풀고 자유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은퇴 후 4년간 1만2000㎞를 걷고 <나는 걷는다>를 쓴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이렇게 말한다. “은퇴란 멋진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서 완전한 자유를 갖게 되는 특혜 받은 순간이다. 과거 청소년기나 성년기처럼 강요된 삶이 아니라 선택된 삶이다.”

물론 은퇴 현실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 때 해결할 과제로 흔히 돈, 건강, 외로움을 꼽는다. 어떤 사람은 그 중에 돈을 건강과 외로움을 해결할 만능 수단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빈곤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돈의 힘은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돈으로 외로움을 달래던 습관이 문제가 된다. 지친 일과 중에 짧게 지나가는 주말과 휴가는 신상품과 과시적 소비로 보상받곤 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허기를 달달하고 기름진 음식으로 달래듯이 말이다. 이렇게 여가의 허전함을 즉각적인 쾌락으로 채우다간 은퇴 후의 긴 자유 시간을 감당할 수 없다. 소비의 쾌감은 중독처럼 더 많은 소비를 부르고 삶 본래의 느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노후 준비로는 저축뿐 아니라 평소의 검소한 생활 습관과 가족 간 유대감이 중요하다.

나는 진료하면서 은퇴하신 분들의 하루 일과를 묻는다. 배우자와 함께 또는 혼자서 매일 뒷산에 오르거나 동네 산책하는 분들은 행복하다. 이들은 건강을 지키고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며 삶을 지긋이 관조한다. 화려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에겐 이런 삶이 지루해보이겠지만 오히려 이들은 삶을 천천히 즐길 줄 안다.

지난달 28일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50·60대는 할 일 없다고 산에 가거나 SNS에서 험악한 댓글만 달지 말고 아세안으로 가야 된다.” 노후에 절약하면서 유유한 삶을 살기로 선택한 사람에게 해외에 나가 각자도생하라고 부추기는 것도 부적절하지만, ‘할 일 없다고 산에 간다’는 말에서 드러나는 삶에 대한 경박한 인식이 더 놀랍다. 개인의 생산과 소비활동이 모여서 국가경제에 기여한다고 하더라도 고위 공직자가 개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훈계하듯 간섭하는 것은 지나치다. 간혹 정부의 경제정책 배경으로 청와대의 ‘국정철학’을 들던데, 혹시 삶에 대한 이런 인식을 그간 국정철학으로 공유해온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