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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상의 世事雜談(38)]야구가 안겨준 한여름 밤의 소확행(小確幸)

야구중계는 한여름 삶의 활력소
보이지 않는 경기의 진짜 묘미는
선수들의 신경전과 생각 읽어내기

2020-08-27     경상일보
▲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코로나와 우울한 국내상황 때문에 몸과 마음이 찌뿌듯한 2020년 여름도 지나간다. 이토록 을씨년스럽고 비감하게 여름을 보낸 건 박사논문을 쓰던 1984년 이후 처음인 듯하다. 기억해보면 도쿄의 그해 여름은 나에게 있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그대로였다. 정말 달이 두 개로 보이고, 발을 디디고 사는 땅은 마치 늪이었다. 지금 이 순간 많은 국민이 조지오웰의 1984년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에게 있어 2020년과 1984년은 무지하게 닮았다. 지금도 그때도 나의 돌파구이자 낙(樂)은 야구중계방송 보는 것이다.

2020년 7월28일 화요일. 저녁모임 내내 나의 관심은 사직야구장에 가 있었다. 부산롯데자이언츠와 창원NC다이노스의 낙동강더비 시즌4차전이다. 말이 호적수지, 다이노스는 안정적인 투수진, 폭발적인 공격력, 강력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시즌 초부터 부동의 리그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면 자이언츠는 선수들의 개인기는 봐줄만하나, 투수진의 안정성 부족으로 리그 하위에 머무르고 있다. 게다가 올해는 큰 점수 차로 이기다가도 역전 당하고, 큰 차로 지고 있다가도 역전승하는 등 삐쭉빼쭉 불안하다.

부리나케 귀가하니 6회 초, 놀랍게도 롯데가 6대 4로 이기고 있다. 곧바로 6회 말 한동희의 적시타로 2점을 추가하며 8대 4로 차이를 벌린다. 이게 웬일이냐. 아냐, 또 역전 당하겠지. 아무튼 이기고 있는 동안은 기분 좋은 법, 나는 음료수 캔을 하나 더 땄다. 7회 초, 롯데는 포크볼전문인 중간계투 박진형을 마운드에 세웠다. 몸이 덜 풀린 듯 솔직담백한 투구에 연속 3안타를 맞더니 순식간에 무사 만루의 위기에 몰린다. 타석엔 한방이 있는 NC좌타자 노진혁. 투수와 타자의 주거니 받거니 끝에 풀카운트에 이른다.

박진형의 고민이 역력하다. ‘포크볼로 헛스윙을 유도할까, 그런데 안치면 밀어내기 볼넷이다. 한번 밀어내기 주면 기세가 잡힌다. 가운데로 꽂을까? 그런데 맞으면 대량실점이다. 그래도 내가 누군데. 밀어내긴 줄 수 없다. 오케. 포크볼보다는 비슷하지만 안전한 스플리터로 가자. 헛스윙, 내야땅볼 중 하나를 노리자.’ 한편 노진혁은 ‘주무기인 포크볼을 던지겠지. 직구를 노리는데 포크볼이면 속아서 헛스윙이지만, 포크볼을 예상하는데 스플리터면 큰 거를 기대할 수 있다.’ 두 선수의 생각을 읽던 약 5초정도의 시간이 나에겐 거의 5분의 느낌이었다. 결국 타자 노진혁의 완승이었다. 싹쓸이 우월만루홈런. 졸지에 8대 8.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얼핏 ‘잘 못 던지고 잘 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론 투수와 타자간의 심리전승부였던 것이다.

분명 나의 추론에 추가로 NC이동욱감독의 작전도 타자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풀스윙하라’고. 혹자는 야구는 상대팀보다 점수 많이 내면 이기는 단순한 스포츠요, 루상(壘上)에 주자가 있는데 후속타가 이어지지 않으면 점수 못내는 억울한 스포츠요, 선수들이 치고 달리는 시간보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시간이 훨씬 긴 한가한 스포츠라고 말한다. 물론 축구, 농구처럼 계속 뛰지 않고, 대부분은 서있다. 뛰어봤자 몇 십 미터 전력 질주할 뿐이다. 그러나 선수간의 심리싸움 외에 상황에 따른 수비위치 변화, 투수의 볼 배합, 투수동작의 허점을 노리는 도루, 포수의 타자신경 건드리는 교란전술, 감독코치의 현란한 사인, 0.003초차이로 결정되는 세이프와 아웃, 희생전술 등등 서너 시간 동안 옴찔옴찔 긴장된 싸움이 연속된다. 야구의 재미는 눈에 안 보이는 곳, 선수들의 생각을 읽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경기를 계속 보자. 9회 초, 노진혁이 다시 등장했다. 이전 타석에서 동점만루홈런을 친 그는 기가 살아 있었다. 믿었던 롯데의 특급마무리 김원중의 속구를 때려 또다시 홈런. NC는 9대 8로 도망간다. 그러면 그렇지, 오늘도 역전패구나. 씩씩대며 TV를 껐다가 5초 만에 다시 켰다. 비가 심해져 70여 분간 경기중단. 나의 경험에 의하면 경기 중단 후 재개하면 무언가 일어난다. 9회말, 롯데의 마지막 공격. 안치홍의 안타, 투아웃에 오윤석의 볼넷, 그리고 정훈의 차례가 왔다. 정훈은 스윙하고 비틀대는 동작이 늘 불안하다. NC의 마무리 원종현은 정훈을 다소 얕잡아 본 듯, ‘빨리 끝내자’라는 생각이 나에겐 읽혔다. 실투를 놓치지 않은 정훈의 굿바이 좌월3점홈런이 터졌다. 11대 9로 재역전, 롯데는 정말 귀한 승리를 낚았다. 밤11시35분.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다.

코로나로 관중의 환호도 없는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팬들에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기 위해 애쓰는 야구선수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낸다.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