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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탑순례]돌덩이 잘라 쌓은 `공덕의 탑`

2004-04-27     경상일보
 
남한강의 상류에 위치한 제천은 물의 본향이다. 남한강 줄기를 낀 곳이며 충주댐이 있어 물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제천을 가면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 의림지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우리나라 최고의 수리 시설인 의림지는 농경민족의 뿌리를 느끼게 한다. 물의 고장 중심에 장락리 칠층 모전석탑이 우뚝 서 천년의 세월을 이어와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적한 시골, 과수원 길을 돌고 밭둑을 따라 들어가서 만나곤 하던 탑은 돌아와 생각해 보면 꿈결인양 아른거렸다. 장락동 탑과 함께 기억되는 것은 해바라기다.
 그 해 8월이었다. 강원도 영월에서 제천으로 들어오던 길이었다. 제천시가 가까워지자 국도 변에 노란 해바라기가 도열한 모습이 장관이었다. 장락동 탑을 향해 가는 길에 끝없이 피어난 해바라기는 화판도 크고 꽃빛깔도 선명하여 연방 탄성을 질렀다. 그래서 칠층 모전석탑은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본 해바라기와 함께 기억되곤 한다.
 봄나들이는 즐겁다. 가는 길에 수많은 꽃과 촉촉한 봄 인사를 나눈다. 파릇한 녹색의 기운을 띄우는 산도 멀리서 손짓을 해 댄다. 무엇보다 탑을 만나러 가는 설렘이 봄이기에 더욱 크다. 4월에 찾은 탑은 의연하다. 7층에 이르는 높은 탑은 햇살을 이고 쭉 뻗어 올라 경쾌하다.
 장락리 칠층모전석탑을 처음 찾아갔을 땐 그저 탑이 그곳에 있구나 정도였다. 두 번 세 번째는 탑이 있어 주위는 한결 푸르고 싱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횟수가 많아지면서 탑 그 자체가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자리에 변함 없이 서 있는 탑이지만 매번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 볼 때마다 그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기도 한다.
 과수원 길을 따라가서 만난 탑이었는데 과수원은 밭으로 변해 버렸다. 게다가 동네 앞으로 큰 도로가 새로 났다. 또한 철길 건너편에는 장락 아파트라는 대 단지가 생겨 탑은 도시와 가까워져 버렸다. 낯선 풍경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래 쳐다보고 있으니 우뚝 선 9.1m 큰 키의 탑은 아파트가 건너다 보여도 여전히 신비하고 경외감을 갖게 한다. 아직 탑내동은 시골 맛이 나서 그나마 다행이다.
 탑이 선 이곳은 장락사터로 알려져 있다. 주변의 밭에서 발견된 수많은 기와 조각이 한쪽으로 켜켜이 쌓여있다. 절터였음을 알리는 주춧돌이 흙 속에서 비쯤이 나와 시선을 끈다. 기와 조각을 만져본다. 이 땅의 흙으로 빚은 기와조각에서 물씬 옛 사람들의 삶이 투영된다. 지금은 탑 옆으로 장락사란 절 집이 새로 들어섰다. 스님도 계시지 않는지 고요하기만 하다.
 장락동 탑은 언뜻 보면 영락없이 벽돌로 쌓은 전탑으로 보인다. 그러나 회흑색의 점판암을 벽돌만 하게 잘라서 쌓은 모전 석탑이다.
돌덩이를 반듯하게 잘라 하나하나 쌓아 가는 정성만으로도 부처님의 자비에 화답하는 것이리라. 고장 사람들의 공덕으로 칠층이라는 높은 탑을 쌓은 아름다운 뜻을 느껴 보기 위해 가만히 만져 본다. 전율이 인다. 그들은 돌을 돌로 본 것이 아니라 혼이 긷든 예배의 대상이 되었고 돌을 다루는 예사롭지 않은 솜씨로 예술세계를 완성해 가는 과정으로 삼았다. 천년 전, 그들의 세계에 초대받아 멀리서 불현듯 달려가곤 한다.
 충북 제천시 장락동에 있는 보물 제 459호인 칠층 모전석탑은 자연석으로 낮은 단층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칠층을 쌓아 올렸다. 전탑과 같은 형식이다.
 일층 탑신은 어떤 탑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몸돌의 네 귀퉁이에 화강암으로 넓게 기둥을 세우고 남쪽과 북쪽 양면에는 문짝이 달린 감실을 만들었다. 양쪽에 문기둥을 세우고 이맛돌을 얹어 문틀을 만들고 돌로 문짝을 만들었다.
 이층 이상의 몸돌은 일층에 비해 높이가 급격히 낮아졌다. 체감률이 적당하여 보는 맛이 장중하다.
 지붕 돌은 상하 모두 층단을 두었고 층마다 지붕 모서리에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있다. 오늘처럼 종일 봄바람이 적당하게 부는 날이면 풍경소리가 넓은 들판에 은은하게 퍼져 나갔을 것이다. 1967년 해체 수리 시 오층에서 사리공이 확인되었지만 내용물은 없었다고 한다.
 탑 아래는 성급하게 봄을 맞으러 나온 하얀 봄맞이꽃이 곱다. 넓은 풀밭을 가득 메운 것은 눈곱만한 보라색 꽃을 피운 개불알풀꽃이다. 혼자 피었다간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못할까봐 무리를 지어 "날 좀 봐 주세요" 하는 양 안간힘을 쓰며 피어 있다. 노란 민들레는 탑을 둘러싼 밭둑에서 자글자글 웃음을 머금고 있다.
 이 작은 풀꽃들과 장대한 탑을 번갈아 쳐다본다. 썩 잘 어울리는 봄 풍경이다.
 방형 삼층석탑이 정형화되어 석탑 조형의 안정기에 들어간 후 제천에서는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석재를 하나하나 잘라 부처님에 대해 한없는 공덕을 쌓아가던 신라 말이나 고려 초쯤 조성된 탑을 수십 번 돌고 돈다. 그 시대의 예술정신이 짙게 녹아 있는 장락리 칠층석탑 이야말로 제천 사람들에게 영원한 문화유산이다.
 이 마을까지 택지가 되고 차들이 줄지어 다닐까봐 마음이 편치 않다. 탑은 무심히 길 건너 장락 아파트를 향해 은근한 자비를 펼치는데 나는 괜한 걱정으로 탑을 떠날 수 없어 서성댄다.

#주변 볼거리
제천은 일찍이 선사시대로부터 사람이 살아온 동네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김제의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삼국시대에 축조된 저수지인 의림지가 있다. 제천시 모신동에 있는 의림지는 오늘날까지 관개용 저수지노릇을 하는 곳이며 풍광이 뛰어나 경승지로 더 유명하다.
 1985년 충주 다목적이 완공되면서 제천의 중심지인 청풍면이 수몰되었다.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유물들로 옛 고을을 재현한 곳이 청풍문화재 단지이다. 오랜 세월 실제로 사용하던 생활도구도 있고 보물인 한벽루와 석조여래 입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재를 둘러보는데는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제천을 간다면 빼 놓지 말아야 할 곳이 월악산 국립공원이다. 많은 계곡을 거느린 월악산은 경치가 빼어나다. 공원 내에 미륵리 절터, 덕주사와 신륵사 같은 전통사찰을 비롯하여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 덕주산성, 신륵사 삼층석탑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근처에 수안보온천이 있어 숙박하기에도 좋다.
#찾아가는 길
울산에서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으로 가다 대구 금오 J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따라간다. 안동 영주를 지나 제천 IC로 나간다. 5번 국도를 따라 제천 시내로 들어 가다보면 영월로 가는 38번 국도가 나온다. 38번 국도를 따라가다 과수원 주유소 사거리를 지나 1㎞쯤 가면 신호등이 있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두구메 마을 이정표가 있고 철길 건너편으로 멀리 탑이 보인다.
 의림지는 제천시 모신동에 있다. 장락리 칠층모전석탑에서 가까운 거리다. 탑에서 다시 나와 38번 도로를 건너 청전 교차로에서 세명대학교 가는 길을 따라 3㎞ 가면 의림지에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