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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82)]피라미드의 수수께끼, 기자(Giza)

이집트 고왕국 멤피스를 수도로 삼고 나일강을 경계로 이승과 저승을 나눠 동쪽에는 도시…서쪽에는 묘역 건설 기자지역이 멤피스의 저승세계인 셈 피라미드의 형상·규모는 권위의 상징 10만명이 20년간 건설한 초대형 공사 초인간적 거대함 경이 넘어 ‘거룩함’ 중왕국시대 들어 도굴·기근·사회혼란 피라미드 축조 중단 동굴식 무덤 조성

2023-06-09     경상일보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아프리카의 중부내륙 빅토리아에서 발원한 거대한 강물은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을 건너질러 북으로 향하다가 지중해에 닿는다. 나일강, 6700㎞에 이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나일강을 따라 사막을 적신 강물은 하구에 이르러 강물에 실려 온 충적토를 쌓아 거대한 삼각주를 만들었다. 비옥한 농토에서는 엄청난 농업생산이 이루어져 잉여 생산물이 쌓이고, 이는 나일 문명의 기반이 되었다. 무려 1 만년 전의 일이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나일강 주변에 도시를 건설하고 세력을 넓혀 갔다. 강은 필수적인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제공했고, 수운이 가능한 교통로가 되었다. 카이로 부근에 있었던 멤피스는 이집트의 북부(상 이집트)와 남부(하 이집트)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기원전 3000년 경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이집트 고왕국은 멤피스를 제국의 수도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나누었다. 나일강 동쪽에는 도시를, 서쪽에는 묘역을 건설한 것이다. 오늘날 카이로 시내 외곽에 있는 기자(Giza) 지역이 바로 멤피스의 저승세계(네크로폴리스)였던 셈이다. 파라오들은 동쪽에 있는 왕궁에서 살다가 사후 나일 강을 건너 저승세계로 향했다. 그곳은 사자의 시신 속에 남아있는 영혼(ka)이 영원히 살아 갈 수 있는 안식처라고 믿었다. 파라오들은 시신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거대한 묘역과 무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 이집트 기자지역의 피라미드.

네크로폴리스는 나일 강변의 부두에서부터 시작된다. 파라오의 시신은 강 건너 왕궁으로부터 배로 운구되어 부두에 내려졌다. 부두로부터 피라미드에 이르는 직선의 길이 뻗어있었다. 길의 입구에는 파라오의 얼굴과 사자의 몸을 갖춘 스핑크스가 지키고 있었다. 석회암 언덕 하나를 통째로 조각한 묘역의 수호신이다. 상여 행렬은 지붕이 덮인 경사로(covered causeway)를 따라 천천히 피라미드로 향했다.

피라미드 동쪽에는 작은 신전들이 자리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살아있을 때부터 신의 아들로서 추앙받았다. 신전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갖추게 마련이었다. 대문간(Entrance hall), 전정(Open hall), 동상 거치대(Stone nich), 수장고(Storage), 지성소(Sanctuary)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장례와 제례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설들은 피라미드와 함께 담장으로 둘러싸였다. 높이 8m의 석회암 담장으로 둘러싼 묘역을 형성한 것이다. 피라미드만 덜렁 남아있는 오늘날의 모습과는 완연히 다른 폐쇄적인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신성한 묘역으로 통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처럼 치솟는 피라미드의 형상은 사막의 지평선 끝에서도 볼 수 있는 거대한 랜드마크였다. 초인간적 거대함은 경이로움을 넘어 거룩함을 표출한다. 피라미드는 바로 성산(聖山)의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다.

기자 지역의 피라미드는 실상 피라미드가 발전한 마지막 단계의 형식이다. 초기의 피라미드는 그리 높지 않았다. 마스타바(mastaba)라는 단순 입방체 형식의 석조 봉분을 만들었고, 그 지하에 묘실이나 제사실을 두었다. 마스타바 위에 다시 작은 입방체를 올려 여러 층으로 쌓는 형식이 나타난다. 바로 단형 피라미드(stepped pyramid)라는 형식이다. 잉카지역이나 고구려 장군총에서도 볼 수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이다.

보다 높고, 보다 거대하게 자신의 분묘를 건설하려는 파라오들의 욕망은 피라미드 형식의 발전을 견인했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처 피라미드는 사각추형의 모습으로서 구조적 안정성을 성취했다. 엄청난 무게의 돌을 높게 쌓고도 흘러내리지 않는 형상을 구현한 것이다. 사각추 형상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700년 경에 출현한다. 고왕국의 절정기에 해당하는 시기다. 단군 할아버지 시대보다 앞서 만든 기념물이 아직까지 잔존하는 셈이다.

기자 지역에 남아있는 쿠프(Khufu) 왕의 피라미드는 평균 2.5t의 화강암 300만 개를 쌓아 만들었다. 가로, 세로 230m 높이 146m에 달하는 거대한 석축 구조물이다. 말이 석조 구조물이지 웬만한 돌산 하나의 규모에 이른다. 석재 사이에는 모르타르 접착재를 넣어 미끌어지지 않도록 하고, 밖에는 흰색 석회암으로 피복해 깔끔하게 치장했다. 꼭대기에 일부 남아있는 외장의 모습으로 유추해 보면 거대한 설산의 모습처럼 눈부시게 빛났을 법하다.

피라미드의 형상과 스케일은 파라오 권위의 상징이다. 10만 명이 3개월마다 교대해가며 20년이 소요되는 대규모 공사였다. 노예를 동원한 강제노동이 아니라 임금을 주고 동원한 임금노동의 사업이었다. 어마어마한 재정이 투입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만한 경제력과 인력동원이 가능할 만큼 고왕국 시대의 이집트는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내부공간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미로화되어 있다. 묘실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좁은 경사로를 따라 피라미드의 중심으로 향해야 한다. 시신과 부장품이 도굴당하지 않도록 엄청난 돌무더기 속에 감춘 것이다. 중심에 있는 묘실마저 시신이 안치된 공간인지 아직도 여러 이설이 분분하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한 설계에도 불구하고 피라미드는 도굴을 피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피라미드가 완성한 지 얼마 못 가 도굴당하고 말았다. 중왕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파라오들은 더 이상 피라미드를 짓지 않았다. 대기근과 사회적 혼란으로 거대건축물을 축조할 경제력도 부족했거니와 도굴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에 숨어들어 동굴식 무덤을 조성하고 입구를 은폐해 버렸다. 과시와 군림보다는 안전한 영면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