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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민의 불역유행(不易流行)(4)]세번째 안보리 진출, 단순한 쾌거 이상이다

10년만에 UN 안보리 이사국에 재선출 1991년 이후 세차례 안보리 멤버 활동 UN 총회 의장과 UN 사무총장도 배출 UNCTAD상 선진국의 지위에 올랐고 G20 회원국에 이어 G7+에 진입했으며 ‘3050’ 7개국 클럽 가입 등 눈부신 성장

2023-08-25     경상일보
▲ 박철민 울산시 국제관계대사 전 헝가리·포르투갈 대사

필자는 오랫동안 군축 및 비확산 업무를 담당해 왔다. 그렇기에, 지난 6월 우리나라가 UN 안보리 이사국으로 선출된 낭보를 접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공식 임기는 내년 1월1일부터지만, 새로운 UN 회기가 9월 시작되면 옵서버 자격으로 안보리 회의에 참석할 수 있고, 이임하는 이사국들로부터 업무 인계도 받게 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 안보리 결의에 반하는 대량파괴무기 도발이 빈번한 상황에서, 향후 2년간 북한 문제를 주도할 수 있게 된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또한 안보리를 떠난 지 꼭 10년 만에, 그것도 지난 10년 내내 단독 후보라는 위상을 유지한 가운데 얻은 결실이기에 더욱 그렇다. 지난 34년간 외교 현장에서, 우리나라의 국제사회 위상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음을 체감해 온 터라, 세 번째 UN 안보리 진출의 의미와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1990년 여름, 평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외교부 입사 2년차였고, 행선지는 스위스 제네바였다. 당시는 해외여행 자체가 신기한 시절이라, 친구들이며 동료들 모두 부러워했다. 핵무기 확산 방지라는 소명의식을 갖고 출범한 핵비확산조약(NPT) 체제의 매 5년마다 개최되는 제4차 평가회의에 한국대표단 일행으로 참석한 것이다. 평가회의는 한 달 간 계속되었고, 필자는 한 달 내내 회의장을 지켰다. 회의장 분위기는 매 순간 긴박했고 긴장감이 넘쳤다. 북한사람들을 그때 처음 보았는데, 머리에 뿔이 없었고 얼굴 색깔도 빨갛지 않아 신기했다. 굳이 말을 걸려고 접근했지만 외면당했던 기억도 새롭다.

▲ UN총회에서 북핵문제와 관련해 발언을 하고 있는 장면.

난상토론의 장에서 찰나의 틈을 비집고 어떻게든 자국의 이해관계를 반영시키려고 혼신을 다하던, 각국 외교관들의 언어 구사력과 기민한 교섭활동이 인상적이었다. 그 경험은 이후 주 헤이그 화학무기금지기구 담당관으로, 군축비확산 과장으로, 유엔대표부 안보리 북핵문제 담당 공사참사관으로, 다시 외교부 대량살상무기 및 국제안보문제 담당 국제기구 협력관으로 성장해 가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90년에는 국제선에서 기내 흡연이 가능했다. 담배 냄새에 예민했던 필자로서는 비행기 맨 뒤편에 위치한 흡연석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지려고 옮겨 다녔고, 담요를 덮어쓴 채 11시간을 버텼던 그야말로 호랑이도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출장 2주 차 주말에 융풀라워에 관광 갔는데, 근처 동굴 쪽에서 우리 말소리가 들려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더니 한국인 가족이 하이파이브로 맞아주었다. 어디 사는지를 서로 묻고 서울 가면 보자고도 했는데, 물론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때는 해외에서 한국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았고, 서양인들이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고만 물었기에, 굳이 돌아서서 “Korean. Not North, but South”라고 정색했던 시절이었다. 상전벽해라고 했던가. 지금은 유럽의 기념품 가게에서 웬만한 서양인 점원들이 다른 동양인들과 우리를 쉽게 구별해낸다.

주 헝가리 대사시절, 부다페스트의 어떤 식당주인은 “한국인들이 더 세련돼 보인다. 한국산 화장품 때문인가”라고 이유를 말했다. 다시 NPT 얘기로 돌아가면, 지금부터 53년 전, 당시 핵무기를 보유했던 미, 중, 영, 프랑스, 러시아 등 5개국은 남아공, 브라질 등 각 대륙에서 우후죽순처럼 핵 개발 조짐이 보이자 자신들의 핵 보유는 정당화하면서 더 이상의 핵무기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NPT 조약을 만들었다.

▲ UN 총회에서 북한의 생물화학무기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과 지금까지 6차례나 핵실험을 한 북한 등 4개국의 핵 개발을 막지는 못했다. 북한이 2006년에 첫 핵실험을 했고, 2000년 초반부터 이란 핵 문제가 다루어졌으니, 1990년 평가회의에서는 1985년 NPT에 가입하고서도 조약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던 북핵 문제가 핵심 의제 중 하나였다. 회의장에서는 한국 외교관들이 IAEA의 전면안전조치협정에서 요구되는 최초신고서 및 핵시설에 대한 설계정보를 제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구소련이 붕괴되지 않았던, 냉전체제의 마지막 평가회의였기에 서방진영과 공산권간 첨예한 대립 속에 설전 공방만 계속 되었고,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비동맹권 국가들도 비현실적인 원론만을 고수하였기에 최종 문서도 채택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회의장 라운지에서 쉬고 있던 필자는 곁에 있던 아프리카 외교관들이 옆 회의장으로 후다닥 달려가고 있는 게 보여 따라갔다. 개발 협력 및 지원 이슈를 다루던 회의장이었는데, 일본의 각료급 인사가 내년도 대외원조금액과 그 내역을 발표하고 있었다. 본국에 보고할 내용을 기록하느라 분주하던 각국의 대표단들은 일본 발언이 끝나자마자 썰물처럼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다음 발언자는 빈 좌석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국제무대에서는 이러한 ‘convening power(소집권력)’이 위상이자 국력이다. 그때는 그것을 일본은 가지고 있었고, 우리에게는 없었다. 1990년 이래 한국은 쉼 없이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 오늘날 UNCTAD상 선진국 지위에 올랐고, G20에 이어 G7+에 진입했으며, 인구와 부를 함께 가진 ‘3050’ 7개국 클럽에도 가입했다. 1991년에야 UN회원국이 되었지만, 세 차례나 안보리 멤버가 되었고, UN총회 의장과 UN 사무총장도 배출했다.

이제는 국제무대에서 우리 대표의 발언을 메모하는 각국 대표단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2014년 말 임기가 종료되기도 전에 안보리 재진출 연도를 2024년으로 공식화했고, 그 후 10년간 우리와 경합할 의사를 보인 국가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일본만이 누려왔던, 아주지역 내 UN 안보리 좌석 예약권을 우리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기쁘다. 단순한 쾌거 이상이기에.

박철민 울산시 국제관계대사 전 헝가리·포르투갈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