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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44)]더욱 소중한 가을의 나날

황금들판·쪽빛바다 무한하지 않아 기후변화와 바다 오염 외면한다면 후손들은 가을의 정취 못느낄지도

2023-09-06     경상일보
▲ 김상곤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가을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진다. 그래서 문득 떠오르는 여행길을 나서기도 하고 소식이 뜸한 옛 친구를 찾아보기도 한다. 사계절 모두 저마다의 정서를 자아내지만 서늘한 가을이 주는 느낌은 어느 계절보다 깊고 편안하다. 특히 혹독한 여름을 보내고 난 뒤의 가을은 주위 사람들에게 작은 정이라도 나누어야 할 것 같은 고마움과 겸허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서늘한 기온 탓도 있지만 눈을 편안하게 하는 빛과 풍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변 풍경의 색조가 변하면 마음과 정서의 색깔도 변한다고 한다.

산이나 바다도 가을이 되면 일 년 중 가장 넉넉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황금 들판과 쪽빛 바다도 가을에서야 완성되는 풍경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편안하고 부드러워진다. 이러한 조화를 어느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이 계절에는 누구나 조금씩은 경건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 고향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고향의 가을 풍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까운 계절을 그냥 보내면 손해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그래서 계절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을 찾아서 여행을 떠난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가까운 산이라도 올라 가을 속에 동참하는 기분을 느끼려 한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신불산 억새를 눈에 담고 싶어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영남 알프스 가을 풍경을 보러 가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가을이 되면 한 번 가보려고 마음을 먹는다. 올해 가지 못하면 내년은 더욱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을이 눈으로 즐기는 계절임은 분명하다.

앞으로는 여름이 점점 가혹하고 사나워질 것이라고 기상학자들은 예측한다. 기후의 평형상태가 무너지면 계절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여름과 겨울이 강한 지역은 봄과 가을이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간다. 미국의 북부 미시간 지역에서 사계절을 보내면서 경험한 일이다. 4월까지 눈이 내리고 10월이 되면 다시 눈이 시작된다. 나머지 짧은 기간 동안 나무가 싹을 틔우고 꽃과 열매를 맺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반도의 가을도 기후가 변화하면 모습을 달리할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도 지금처럼 넉넉한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염려가 하릴없는 노인의 기우이면 좋겠다.

가을 바다의 모습도 염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해수의 수온이 조금씩 높아진다면 바다의 모습도 변할 것이다. 우리는 푸른 바다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어느 곳에서나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고 언제 찾아가도 먹을거리가 넘치는 곳이 바다다. 그동안 우리는 바다의 무한한 힘을 믿고 살았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해도 바다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해산물을 아무리 잡아내고 건져 올려도 바다는 소진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쓰레기를 버려도 바다는 오염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바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자연의 무한한 인내력과 생명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징조를 천천히 보여주고 있다. 빙하가 녹고 있는 북극이나 남극의 모습이 그렇고 물고기가 다른 곳을 찾아 떠나는 우리 앞바다의 모습이 그렇다. 더 많은 물고기가 앞바다를 떠날 것이다. 그들은 인간보다 바다를 더 잘 알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라는 말은 강 건너 불같은 걱정거리였다. 바다 오염이라는 말도 눈앞의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후변화나 바다 오염이 우리 가을의 모습을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안타깝고 두려운 일이다. 지구 위에서 자신의 터전을 훼손하고 소진하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종족은 인간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삶의 터전이 영원히 안전하고 풍요롭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다. 참으로 책임 의식이 부족한 주인이다.

김상곤 칼럼니스트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