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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86)]카르테이지(Carthage): 카르타고의 영광과 몰락

지중해에 위치한 북아프리카 튀니지 기원전 9세기 등장 무역도시 카르타고 세계적 패권국가였으나 로마에 멸망 이후 아랍 이슬람·오스만·프랑스 등 아프리카 아닌 유럽·중동문명 거쳐가 문명을 알려면 장소보다 사람 살펴야

2023-10-20     경상일보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로마에서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로 향한다. 버킷 리스트에 깊숙이 감춰두었던 신비의 나라다. 미지의 여인을 만나는 것보다 더 설렌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북아프리카의 해안가 풍경은 타잔의 밀림도 아니고, 동물의 왕국에서 볼 수 있는 사바나의 초원도 아니다. 유럽의 지중해 연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곳에 자리 잡았던 문명과 역사 또한 유럽이나 중동에 가깝다. 땅을 중심으로 문명을 이해하려는 선입견이 늘 문제다.

역사적으로 보면 튀니지만큼 파란만장한 역사적 과정을 갖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카르타고와 로마제국, 아랍의 이슬람, 십자군과 오스만 제국,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배에 이르기까지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지배 세력과 문명이 이 땅을 거처 갔다. 그들이 살았던 흔적은 대부분 유적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카르타고가 건설했던 위대한 도시의 증거는 변변한 건물 하나 남아있지 않다. 땅속을 뒤져 몇 겹의 시대층을 벗겨내야 나타나는 카르타고의 역사, 그것은 신비에 가깝다.

전설같은 카르타고의 역사는 기원전 9세기경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본래 중동의 가나안 땅에 살던 페니키아인들이었다. 뛰어난 조선 기술을 갖추었던 그들은 투니스 만을 차지하며 서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투니스만은 항구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 섬 사이에 좁은 해협이 형성된 곳이었다. 지중해의 중간 길목을 차지하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지중해 일대에 광범위한 무역식민지를 개척했다. 실로 몇 세기 만에 지중해 패권을 거머쥔 세계적 패권 국가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튀니지 땅에 정착한 페니키아인들은 중동과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을 중계하는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경제력을 축적했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해군기지를 포함하는 첨단도시를 건설했다. 오늘날 튀니지의 수도 투니스(Tunis)에서 지중해 해안으로 약 10㎞ 거리에 소재한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전설의 도시 카르타고가 바로 그곳이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했다. 높이 13m, 두께 3m 이상의 견고한 성벽이 해안 쪽으로의 접근을 가로막았다. 내륙 면에는 3중의 성벽을 구축해 후방공격에도 대비했다. 성밖에는 농경지를 경영해 식량원으로 삼았다. 성안의 구릉지 정상부에는 그리스계 폴리스처럼 아크로폴리스를 건설해 종교적 구심점으로 삼았다. 주택들은 구릉의 경사면을 따라 등고선 상에 배치되었고, 항구 쪽으로는 시장이 열리는 아고라가 있었다고 한다.

가장 놀라운 시설은 항구와 부두시설이다. 내륙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온 항구시설은 2개의 인공항구로 나누어 군사용과 상업용으로 구분했다. 코톤(Cothon)이라 부르는 해군기지는 원형의 시설로서 220척의 함선을 수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과연 막강한 해군력과 해상무역기지를 갖춘 첨단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구 70만을 수용하고, 300개의 동맹도시를 거느린 대도시였으니,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우스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힌 도시”라고 찬탄할만하다.

그러나 대제국의 영광이나 위대한 도시 문명은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서양사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카르타고는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로마와 쟁투를 피할 수 없었다. 소위 포에니 전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수십 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한니발의 영웅적 활약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무릎을 꿇게 된다. 로마는 전쟁 기간 중 당했던 수모를 잔인한 방식으로 보복했다. 카르타고 땅에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남기지 않도록’ 완전히 파괴해버린 것이다. 카르타고 문명의 증거는 변변한 건물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로마는 기원후 1세기경 카르타고를 로마식 도시로 재개발했다. 격자형 가로망을 갖춘 로마식 도시계획이 적용되었다. 히포드럼, 오데온, 극장, 수조, 목욕탕, 바실리카 등 로마인들의 도시생활을 위한 공공시설들이 들어섰다. 언덕 정상부에는 아크로폴리스를 대체하는 교회를 건설했다. 그러나 위대한 로마 도시도 역사의 풍화를 견뎌내지 못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로마 도시의 유적은 안토니우스 대욕장 뿐이다. 기원후 2세기에 건설된 이 욕장은 이탈리아 반도 밖에 건설된 것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례로 알려진다.

▲ 안토니우스 대욕장 유적.

욕실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평면을 가지는 것은 남녀 욕탕의 구분으로 볼 수 있다, 중정 형식의 아트리움을 두었고 팔각형 평면의 욕실은 돔 천정으로 덮었다. 간간히 남아있는 내벽 장식 재료에서 화려하고 사치스런 로마인들의 목욕문화가 그대로 드러난다. 욕장은 또한 로마인들이 석재를 쌓아 만든 조적 기술을 다양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석재 아치와 볼트, 터널형 볼트, 다양한 석조 구조의 형태가 남아있다.

바닷가 쪽으로는 미끈한 대리석 기둥 몇 개가 남아있다. 화려한 코린트식 주두를 갖는 대리석 기둥이다. 신전과 같은 고급 건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주두는 여러 층의 원반 형태로 우아하게 가공했고, 기둥 몸체에는 세로 줄눈이 수직성을 강화시킨다. 야자수만큼이나 높지만 엔타시스(entasis; 배흘림)기법을 사용해 늘씬하게 보인다. 웅장하고 늠름한 자태는 정복자 로마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듯 꼿꼿이 서 있다.

그러나 위대한 로마제국의 문명도 대부분 땅속의 유적이 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한 아랍 이슬람 세력은 로마제국의 도시 위에 이슬람 디아스포라를 건설했다. 스페인까지 진출했던 이슬람 문명은 오스만의 정복으로 대체 되었고, 오스만은 프랑스에게 패하면서 이 땅을 넘겨주었다. 이렇듯 북아프리카는 아프리카 문명권이 아니라, 지중해 문명권에 속한다. 문명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소보다 사람을 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