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혜빈 울산 동구의회 의원

영국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등재됐을 정도로 유명한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났다.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든 만큼 서두를 필요가 있었고, 전쟁 이후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국민들도 이에 부응하면서 이 문화가 자리 잡았다. 때문에 선진국들이 몇 세기 동안 닦아온 길을 40년이라는 단기간에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빨리빨리’ 문화의 부작용도 분명 존재한다. 과거 한국인들은 지금처럼 빨리빨리를 외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했다.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에는 한국인들이 상당히 느긋하고 심지어 ‘게으르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한국인 스스로도 ‘은근과 끈기’ 또는 천천히 끓고 오래 가는 ‘뚝배기’라도 정의해 왔다.

우리 사회가 빨리빨리를 외치면서 서두르고 조급해하는 사람에서부터 느긋한 사람까지 천차만별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적 성격은 모두 빨리빨리에 맞춰야 한다. 빠른 적응과 신속한 일 처리가 필수적인 생존 조건이 되면서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소외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느린학습자 혹은 경계선지능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아직까지 이들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의, 명확한 실태조사나 통계는 없다. 일반적으로 지능지수(IQ)가 71~84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을 말하고, IQ 정규분포도 상 경계선 지능에 해당하는 인구 비율(13.6%)을 따져 국내에 약 699만명 정도가 있을 것으로 추산할 뿐이다.

이들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적 수준이 낮기 때문에 ‘빨리빨리’ 문화와 성적 지상주의가 만연한 한국의 환경에서 늘 뒤처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선 지능은 특정할 수 있는 명확한 증상이 없고, 외모나 행동에서도 특징이 드러나지 않아 사회적 배려를 받지 못한다. 오히려 학습부진아, 사회부적응자 등으로 낙인찍히기 일쑤다. 또 국내 지적장애 기준인 IQ 70이하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의 지능이지만 기본적 성격의 법률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면서 전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조례안을 만들어 지원에 나서고 있다.

필자도 지난 제219회 임시회에서 이들의 자립 및 사회참여를 높이기 위한 ‘동구 느린학습자 평생교육 지원 조례안’을 대표 발의했다. 느린학습자의 평생교육에 초점을 맞춘 것은 울산 최초 사례다.

이 조례안은 느린학습자에게 학교의 정규교육과정을 제외한 학력 보완, 성인 문자해득, 직업능력 향상, 인문교양, 문화예술 등의 교육활동에 행정·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관련 유관기관 및 단체, 의료기관, 평생교육기관, 직업훈련기관 등과 협력체계를 구축해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했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의 적극적인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다. 지난 제21대 국회에 ‘경계선지능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포함한 관련 법률안 4건이 발의됐지만 임기 내에 처리되지 못해 전부 폐기됐다. 부디 제22대 국회에서는 관련 법률안들이 제정되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정책을 마련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사회적 인식도 개선되어야 한다. 지적장애는 유전적 요인의 영향력이 더 크지만 경계성지능은 환경적 요인의 영향력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어릴 때부터 맞춤형 지원이 이뤄진다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단 이들이 제 기능을 하는 분야를 찾을 때까지 기다림이 필요하다. 이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뿐 아니라 경계성지능인들과 함께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 주변 사람들의 몫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빠름을 추구하면서 느림에 소홀했다. 느림은 죄가 아님에도 사회적으로는 소외되고 배척되어 왔다. 이제는 변해야 한다. 느림을 인정하고, 느린 사람들이 따라 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회가 되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윤혜빈 울산 동구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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