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눠야할 행복이 있어서 벽은 문이 되었다손잡이에서 작은 온기나마 느낄 수 있어서 문은 아직 희망이다 초인종을 누른다. 손잡이를 놓치기 전에 문이 열렸으면기척을 기다린다. 닫혀있는 문은 동굴 같다문이 열리면 금세 사라지고 말 동굴 속에서하나가 되지 못해 끝내 벽이 ...
지난 생에 꽃으로 맺은 약속을 잊지 아니하여 왔더니소낙비에사나운 바람에복사꽃 짧아서붉은 꽃잎 편지는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네조각난 저 편지한 잎, 당신의 입술을 읽네한 잎, 당신의 눈을 읽네한 잎, 당신의 가슴을 읽네한 잎 저 글속에내가 저벅저벅 걸어...
운전면허 갱신 기간이 지난 아내를 따라범칙금을 납부하러 파주경찰서에 간 날거기서 다시 그를 만났다고소고발인 홍길동민원인 홍길동분실신고자 홍길동사백 년째 민원인으로 혹은 그 대리인으로그는 서류에 이름을 남기고 있었다대출을 받으러 농협에 간 날은거기서도 그를 만났다원래 근...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젖을 줄 알면서옷을 다 챙겨 입고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비의 기억을 되돌려주기 위해흠뻑 젖을 때까지흰 장르가 돌 때까지비의 감정을 배운다단지 이 세계가 좋아서비의 기억으로 골목이 넘치고비의 나쁜 기억으로 발이 퉁퉁 붇...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한 아이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아니다 아니다!’하고 읽으니‘아니다 아니다!’따라서 읽는다‘그렇다 그렇다!’하고 읽으니‘그렇다 그렇다!’따라서...
아름다운 것을 보면화려한 것을 보면사람들은 시인에게멋진 시를 지으라고 요구를 한다좋은 것을 보면 시가 나오고즐거운 것을 보면 노래가 되려면슬픈 것들은하찮은 것들은어찌 할거나!슬픔을 삭여 아름다운 시를 낳고혼자만의 아픔 속에서 사랑을 노래 할 진대시인은 시시하게 살고독자...
담장 휘어진 가지마다 횃불을 밝히는 낯선 곳으로 이끌려 온 듯 두리번두리번봄은 꽃의 입구를 찾는다봄이 꽃들의 구치소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 (면회 시간이 너무 짧다고, 一生이 그러하듯이)꽃들과 봄은 서로의 문을 쉽게 찾는다 서로에게 아직 그 향기 남아 있으므로 활활 타오...
사랑했었노라고 그땐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고백하고도 싶었다-그것은 너나 나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나가차는 주저앉고 만다사...
누가 뼈 있는 말을 던지면덥석, 받아 문다너도 모르게 뛰어오르는 것이다네 안에 주둥이는 재빠르다말을 던진 사람은 모른다점잖게 무너진 한 영리한 개가제 앞에 돌아와 앉아 있는 것을이것은 복종의 한 종류는 아니고향후 실체를 좇아야 할 냄새의 영역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 ...
솜꽃인 양 날아와 가슴엔 듯 내려앉기까지의아득했을 거리를 너라고 부른다기러기 한 떼를 다 날려 보낸 뒤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저처럼의 하늘을 너라고 여긴다그날부턴 당신의 등 뒤로 바라보이던 한참의 배후를너라고 느낀다더는 기다리는 일을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먼저 나서...
기다리지 않아도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
고등어를 칼로 내리친다파르르, 결의 떨림이 칼자루를 지나온몸으로 퍼진다. 아침 햇살이팽팽해지는 공기를 뚫고푸른 등 위에 내리꽂힌다순간, 내 속에 살의가 번뜩인다저만치 떨어져나간 고등어 대가리무얼 저리도 골똘히 생각하나비린내를 없애려고청주 한 숟가락 뿌리다가얼른 목구멍으...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밤 열한 시가 넘어가는 노점통여자들은 꾸물꾸물한 어둠 밑에서가요무대를 듣는다질긴 하루를 덮어야 할 시간뭔가에 취한 남자는 평상에서 잠들었다야채를 판들 무엇 할 것이며생선을 판들 무엇 할 것이며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무지 의미가 없다술...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온몸에 어...
경주 가는 삼릉에는삼릉보다 유명한 칼국수집 있더라할머니 두 분 10년 넘게 손칼국수 만드는데알고 보니 발 칼국수였더라손으로 치대고 발꿈치로 조근 밟아정월 보름 남산에 걸린 달만한 반죽거리쌓으면 삼릉보다 당연히 높고남산만큼 높을 텐데,국수 가락 쫙 펴들면 서울 남산 갔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 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
옛집은 누구에게나 다 있네. 있지 않으면 그곳으로 향하는 비포장 길이라도 남아 있네. 팽나무가 멀리까지 마중 나오고, 코스모스가 양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는 길. 그 길에는 다리, 개울, 언덕, 앵두나무 등이 연결되어 있어서 길을 잡아당기면 고구마 줄기처럼 이것들이 줄줄...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
낡은 수첩에 적힌 이름들을새 수첩에 옮겨 적는 일로한 해를 시작한다 늘 그랬듯이몇몇 이름들이 빠져나간 자리에작은 구멍들이 생기고구멍을 빠져나온 이름들이천천히 망각의 강을 건너는 동안새로 나타난 이름들이빈 구멍들을 메워 가리라내가 수첩을 정리하는 동안누군가의 수첩에도 구...
흔적 남기지 않으려 했는데군데군데 낯선상형문자 하나씩 늘어 간다어릴 적 누워서 바라보던 천장사방연속무늬 사라진 지 오래인데무늬가 자라는 옷은 헐겁다마음의 무늬엔 김칫국물이 커피 자국이닳아버린 몸에 밀린 일기를 쓰고 간다아무리 문질러도 빠져나오지 않는송곳 같은 말만 등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