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감자~타박이 감자 있심데이~”활기가 넘치는 오일장이다. 청 매실을 찾아 시장 골목을 돌아본다. 유월의 햇살아래 야물어진 채소들이 장터 곳곳에 펼쳐져 있다. 씨알 굵은 감자가 담긴 소쿠리 옆에는, 이제 갓 눈을 뜬 병아리들이 연신 ‘삐약~삐약~’소리를 내며 종이상자에 담겨 있다.그 옆을 돌아 소매상들이 자리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귀 왼쪽에는 볕에 그을려
산책은 가볍게 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나 몸이 무거울 때 자연을 벗하며 걷고 나면 얼마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산책을 즐기는 나는 그날도 길을 나섰다. 아파트 옆 공터에 평소에 못 보던 작은 집 한 채가 놓여 있었다. 이제 막 사들인 듯 깔끔하게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개나 고양이가 살 법한 집이었다. 공용 장소에 놓
공부란 내가 뭘 모르는지 깨닫는능력을 기르는 일이다.세월을 잔뜩 껴입은, 칠십 평생책상 서랍 속에 간직해두었던배우고자 하는 철통같은 의지를매일 꺼내는 ‘소녀’와의 만남이니나는 그분들 앞에서만큼은설레지 않을 수가 없다.인간은 의지를 품고 살면 꺾이지 않는다. 삶은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영화 (장예모 감독)는 마치 우리 교실 풍경
북구청 여권계 옆 벽면에 설치된감성을 충전하는 문학자판기짧은 글 버튼을 누르면 잠시 뒤배출구로 나오는 종이 한 장종이에 인쇄된 대문호의 한 문장짧은 유효기간의 반성과 다짐마음을 함께 담아 잘 접어둔다매주 두 번씩 북구청에 갈 일이 있습니다. 남구에 살다보니 북구의 공공기관을 찾을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낯선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횡단보도 보행 신호를 기다리
J언니는 손잡는 걸 좋아합니다. 만나면 두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반갑게 안부를 묻지요. 처음 언니의 환대를 받았을 땐 나도 모르게 뭉클해지며 마음의 빗장이 스르륵 풀리는 게 느껴졌답니다. 언제부턴지 누구를 만나면 우선 경계부터 하고 있었나봅니다. 언니의 따뜻한 손길에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굳어 있었는지를 알았습니다.J언니와는 아들이 어릴 때 친구 엄마로
배추가 김치라는 이름을 얻기까지다섯번은 죽어야…고통속에 얻는 이름생 김치라 하기도 익은 김치라 하기도어정쩡한 때를 ‘김치가 미쳤다’ 표현해어린이도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중2’부모가 “미치겠다”는 말 많이하는 때사춘기·진학·취업처럼 경계에 섰을때변화로 인한 혼란 두려워 말아야김장김치 한 포기를 꺼낸다. 시원하게 삭아 새콤한 향이 퍼지니 침부터
마음의 열쇠를 찾다-김진철作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린 어머니큰형의 마들렌 선물은 기억해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마들렌을 녹인 홍차 한스푼이마르셀의 어린시절을 불러낸 것처럼어머니의 잃어버린 시간도 찾아오길"와 엄마 돈 훔치갔노?”어머니로부터 난데없이 추궁을 받은 그날은 작년 12월 이맘때다. 그 전화를 받고서 설마 하던 게 우리한테도 왔구나 하고 직감했
훌륭한 장인정신 속에서 벼루 탄생글을 쓰는 마음도 벼루장인과 같아세월이 흐르면서 연필·펜·전자펜 등사용하는 필기구도 변화하고 있지만깊은 묵향서 나오는 필력 못따라가얼마 전 집을 옮겼다.이사를 할 때마다 나는 묵은 짐을 과감하게 내다버린다. 그런데도 절대 버리지 않는 물품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가장 소중하게 보관해 온 것이 벼루와 고서다. 별로 쓸 일은
나도 모르게 새겨진 추억의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곳에는 어김없이배 밭이 있고 일하는 어머니가 있어배 한 알이 태어나는 데는사람의 손길이 오십 번 이상 가야분주히 움직여야 좋은 결실로 응답지금도 여천 고개 올라서면언덕마다 배나무가 보일 듯해마음이 앞서 가는 곳을오늘도 나는 따라갈 수밖에 없어올 추석은 유난히 빨랐다. 차례 장을 보면서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춘
소유는 배타적 권리주장 아니라한걸음 떨어져 보고 느끼며완상·완람의 즐거움 추구하는 것소유에 집착 않음으로써 외려순간의 진면목에 충실할 수 있어차를 타고 가는데 나지막한 둔덕에 하얀 꽃무리가 눈부시다. 구름을 두른 듯 몽롱한 꽃빛깔을 보니 배꽃인 것 같다. 둔덕을 따라 배 과수원이 띠처럼 펼쳐져 있다. 일행 중 나이 지긋한 한분이 배 밭을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한적한 오후에 아내와 함께 ‘박상진 호수공원’ 둘레길 산책을 했다. 무룡산 줄기가 길게 뻗어내려 호수에 발을 담그고 있는 풍수가 신령하다. 산줄기는 빨대처럼 생명수를 끌어올려 초록빛 뭇 나무들 먹여 살리고 있으리라. 띠를 두른 호방한 호수둘레길 따라 산책을 한다. 명상에 잠겨있는 호수 풍경에 흥취된다. 날선 형상화 사유가 일어나는 호수는 만연체 수필이다.독
이른 봄날, 산길에서 절집을 만났다. 법당과 요사체가 함께 붙어있는 작은 도량이었다. 마당 끝에 아름드리 몇 그루의 나무들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었다. 법당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나무그늘 아래 놓인 평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엉덩이를 슬그머니 걸치고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얼른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누워서 눈
어머니는 그 옛날농부였던 것이 아니라그때나 지금이나 꽃을 좋아하는소녀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그 꽃밭에서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남은 생 행복했으면 좋겠다.고향집 텃밭에는 언제부턴가 채소가 사라졌다. 어머니는 구부정한 허리 통증 때문에 밭일을 하지 못한다. 60여 년 동안 해오던 농사를 접기 시작하면서 점점 약해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절대 그만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들이 모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40년 만이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 한곳에 모이기는 쉽지가 않았다.모임 장소는 바닷가의 장사 마을이다.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고 아담하게 민박집으로 개조한 곳이다. 대청마루 앞에 유리문을 달고, 재래식 화장실을 편리하게 고친 흔적이 보인다. 무엇보
아들과 나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을까?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 된 아들의 이삿짐을 챙기며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마음이 엉뚱한 곳에 있으니 이삿짐 싸는 일도 지지부진 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수첩을 찾아 생각나는 대로 챙겨갈 물건들을 메모했다. 그러고 나서 옷부터 종이상자에 차곡차곡 넣었다. 아무래도 옷부터 정리해야 정신을 차릴
마른 잎을 걷어내자 푸르스름한 수선화 촉이 올라와 있다. 아직 겨울 빛이 다 가시지 않았는데도 봄을 기다리는 것은 나뿐이 아닌가보다. 꼿꼿하게 올라오는 잎이 반가워 손가락으로 만져본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에 걷었던 낙엽을 다시 덮는다. 따스한 햇살이 마당가득 내려앉아 있다. 봄기운이다.하우스 문을 활짝 열고 연탄을 간다. 하우스에는 다육이들과 꽃들
거실 한쪽에 반닫이가 놓여있다. 저고리와 치마에다 은밀한 속옷까지 갈무리해 놓고 있다. 깨끗한 수건으로 자주 닦다 보니 정이 들었다. 애초에 나비 장석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봄날이었나 보다. 반닫이를 닦고 있을 때 창문에 비친 햇살을 타고 나비 한 마리가 내 안으로 쑥 들어왔다. 아, 그때부터였던가 보다. 어느 장인의 솜씨인지 야무지게 다듬
지난해 가을, 시민문예대학 글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후에 있을 작가모임도 미뤄진 터라 마음이 한결 느긋했다.굴화마을 고속도로 굴다리를 막 벗어나고 있었다. 한 여인이 톡톡 튀는 서울 말씨로 이곳 너머도 나무가 있냐고 물었다. 초면인데 느닷없이 묻는 어투가 격 없이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여인과 맞닥뜨린 곳은 고속도로 근처 근린시설지역으로 공
“외손주 키운 공은 없다카더라.”“가만있으면 자식이 알아서 할 낀데 우짤라꼬?”두 달 만에 만난 친구들이 돌림노래를 한다. 작년에 친손자를 본 친구조차 거든다. 아들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는 손자 돌보기를 거부하자 며느리가 퇴직했단다. 돈 벌어 부모 주는 것 아닌지라 도우미를 구하든지 직장을 그만두든지 내버려 두고 내 인생이나 챙기란다. 예순 줄에 꿰진
밤나무 아래는 속이 빈 밤송이와 벌레 먹은 밤톨만 어지럽다. 나뭇가지 한쪽에 간짓대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고, 밤송이는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남이 먼저 다녀간 줄 알았더라면 일곱 남매가 바쁜 시간 쪼개가며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빈 자루로 돌아가려니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고향 마을 뒷산이 밤나무밭이 된 것은 내가 결혼을 하고 난 칠십 년 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