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왕검이 신시에 고조선을 조국(肇國:최초로 나라를 세움)한 이래 78소국으로 이루어진 삼한은 부족장의 시절. 고대 왕들의 역사는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운 뒤로 시작됐지. 그중 고구려, 신라, 가야는 알에서 깨어난 왕들이 세운 나라야. 그로부터 733년 뒤에 신라가 사국을 아울러 통일국가를 세웠어. 고려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완전한 통일국가를 세웠고.
목련이 피기 시작하던 봄날. 화랑이던 효종랑은 봄맞이 야유회를 남산 포석정에서 열었지. 젊은 화랑들이 모두 약속시간에 오는데 두 사람이 늦게 오거든.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두 화랑이 말했어.분황사 동쪽 마을에서 스무 살쯤 된 한 여자를 봤습니다. 여자가 눈먼 어머니를 껴안고 목 놓아 울기에 마을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었지요. 마을사람이 그러데요. 여자의
모량리 사람 손순은 부모를 봉양하며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살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내와 더불어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지. 하루는 아이가 노모의 밥을 뺏어 먹는 걸 본 게야. 손순은 보고 있을 수 없어 아이를 나무라고 다신 그러지 말라고 해도 끼니 때만 되면 아이가 노모의 밥을 먹거든. 나중엔 노모가 몰래 밥을 주기까지 한다는 걸 알았
신라 경덕왕 때에 흉년이 들어 난리였어. 먹을 게 없어 마을엔 도둑이 끓고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곤 했지. 산적들은 행인의 봇짐을 털고 신체 일부를 잘라가기도 했다는 시절. 어느 날 왕이 중시에게 말했지. “곳간의 곡식을 꺼내 향득 사지에게 상을 내리시오.” 중시가 아뢰었지. “곳간에 곡식이 그리 많지 않은데 얼마나 내릴까요? 이왕 내릴 거 오백
경주 모량리에 한 아이는 가난한 홀어머니(경조)의 품에서 자랐어. 아이는 머리가 크고 이마가 몹시 널따란 게 성곽을 닮았다고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지었겠다. 대성은 부자(복안)의 집에서 어머니가 품팔이를 하고 받은 밭뙈기를 경작하며 살았단다. 어느 날 점개 스님이 복안의 집에 와서 흥륜사에서 열릴 육륜회를 위해 시주를 권했지. 복안이 베를 시주하니 스님이
신라 문무왕 때야. 진정 스님은 청년 때 군역에 종사하는 몸이었지. 집이 가난해서 장가를 갈 도리가 없었어. 복역하는 동안에도 품을 팔아 곡식으로 바꿔 홀어머니를 모셨지. 재산이라고는 다리 부러진 솥 하나뿐이었대. 어느 날 한 스님이 와서 시주를 해달라기에 어머니가 솥을 홀랑 줘버렸지.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리자 아들이 그랬어. 우리같이 가난한 살림에도 절
8세기 후반, 경주에선 염불 소리가 끊이질 않았겠다.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 있고 그 마을에 있던 절 피리사엔 괴상한 스님이 있었지. 밤이나 낮이나 염불이 흘러나오니 백성들은 그 소리를 위안삼아 고된 일상을 견딜 수 있었지. 염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낭랑하고 구성진 나무아미타불 소리는 피리사로부터 사방 17만호까지 퍼져나갔지. 스님을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장자가 말했지. 새가 쪼아 먹어 하늘로 사라지나 벌레가 먹어 땅속으로 흩어지나 죽는 건 마찬가지니 가장 자연스러운 장례를 해 다오. 며칠 뒤 장자의 시신은 초원 위에 뉘였고 그의 유언대로 새가 날아오고 벌레들이 기어 나와 장자의 시신을 파먹었지.신라 경덕왕 때엔 신이한 죽음 이야기가 있어. 삽량주(양산) 동북쪽에 있
세상엔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못 믿는 일도 있고 눈으로 보고도 못 믿는 일이 있어. 경주 남산에 있던 실제사의 영여 스님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그 성씨가 뭔지도 몰라. 그렇지만 덕이 높고 행실이 발라 백성들의 우러름을 한 몸에 받았지.신라 경덕왕 때였어. 왕이 영여 스님에게 공양을 드리려고 사람을 보냈지. 스님은 정중하게 거절했
가벌이, 화를 푸시게. 을병이, 자네도 왔구먼. 파쟁이, 미안하네. 말달리, 쭉 들이키게. 미도참, 을보서리, 구병무라, 한잔 주게. 보라국, 고자국, 골포국 전사들아 모두 한잔하게나. 따른 술잔을 허공에 부딪치던 물계자가 벼락(칼)을 뽑아들고 칼춤을 추니 그의 눈에 보이는 혼령들이 함께 춤판을 벌였지. 그를 지켜보던 아내가 나섰어. 여보, 여긴 아무도 없
8세기 말엽 신라 원성왕 때였어. 영재 스님은 익살스러운 성격에다 재물 욕심이 없고 향가까지 잘 불렀겠다. 구순이 다 된 늘그막에 남악(지리산)에서 은거하려고 길을 걸어갔지. 대현령에 이르러 60명이 넘는 도적떼를 만난 게야. 도적들이 으름장을 놓았지. 가진 거 내놔. 안 그러면 작살내겠다. 그래도 영재가 말없이 갈 길을 가거든. 칼날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신라 때 포산(비슬산)에 숨어 산 관기와 도성.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는데 서로 십리가량 떨어져 있었지. 두 사람은 낮엔 구름을 헤치고 달밤이면 노래하면서 서로 오갔어. 도성이 관기를 부르면 나무가 남쪽으로 휘어지며 관기를 맞이하는 것 같아 관기는 도성에게 가고, 관기가 도성을 보고 싶으면 나무가 북쪽으로 구부러져 도성이 관
바둑돌은 한 번 놓으면 무를 수 없고 사나이의 입은 천금같이 무거워야 하느니라. 왕자 승경이 궁정의 잣나무 아래에서 선비 신충과 바둑을 두며 덧붙였지. 훗날 내가 임금이 되었을 때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돼 줄게요. 신충은 승경에게 감사의 절을 했어.승경은 몇 달 뒤 효성왕이 되었지. 근데 왕은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그 차례
백제 무왕 때(7세기 초)의 혜현 법사는 그 어렵다는 법화경을 술술 외웠지. 한날은 수덕사 법당에 온 신도의 신발을 세는 버릇을 알아챘지. 이렇게 신발이 많으니까 복전함이 두둑해진다는 생각에 속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한 게야. 이래선 대중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걸, 세 치 혀로 법문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걸 뉘우쳤어. 이제부터 진정 고요함을 찾아 수행승
8세기 말엽, 연회 법사는 영취산 한 암자에서 정진을 거듭했어. 뜰 안의 연못에는 연꽃이 피더니 계절이 바뀌어도 그대로였지. 신라 제38대 원성왕이 그 신이한 이야기를 듣고 연회를 국사로 삼으려 하니 법사는 암자를 떠나 도망을 친 게야.그가 서쪽 고갯마루의 바위를 넘어갈 때였지. 한 노인이 밭을 갈다가 어딜 가냐고 물었겠다. 법사가 대답했지. 대왕께서 뭘
삽량주(양산) 영취산에 낭지라는 스님이 있었지. 암자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신통력이 있었지만 그가 누군지는 몰랐대. 하루는 지통이라는 어린 중이 까마귀의 속삭임을 들었지. 까까 까까옥 까옥까옥. 지통은 까마귀의 전언-영취산에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어라-을 알아듣고 그 산을 오르다가 한 거지를 만났지. 근데 그 거지가 지통에게 계를 주곤 사라지거든. 지통은 그
신라 제40대 애장왕 때였어. 알몸으로 여인을 껴안고 눈길을 내쳐 달려간 스님에게 상을 줘야 한다는 민심의 소리가 들려왔지. 그게 나랏일만큼 중한가 해서 주저하는 애장왕 앞에 숙부인 김언승―809년에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인―이 나섰겠다. 눈밭에서 아기를 낳고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그 여인을 불러오너라.대궐에 나타난 여인은 스물두 살 나이의 거지였지. 여
융천사여, 이 난리를 막아주시오. 서기 607년에 살별(혜성:왜국을 상징)이 심대성(신라를 상징) 쪽으로 접근하자 진평왕이 하소연을 했겠다. 때는 초가을, 거열랑과 실처랑, 보동랑이 화랑들을 이끌고 풍악산(금강산)으로 막 단풍놀이를 떠난 때였어. 하늘에 꼬리를 길게 뻗친 살별이 심대성에 부딪치기 직전이거든. 궁궐과 여염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지. 살별이 심대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김현은 흥륜사에서 밤늦도록 탑을 돌았어. 한 낭자가 따라 돌다가 눈이 맞아 정을 통했겠다. 김현은 낭자의 숲속 움막까지 따라갔어. 거기엔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 낭자가 사실대로 말하자 할머니가 말했어. 이미 저지른 일이니 우선 몸을 숨겨줘라. 잠시 후, 범 세 마리가 사람의 비린내를 맡고 킁킁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게야. 이때 하늘
망덕사의 승려 선율은 반야경을 베껴 쓰며 정진하던 중에 저승사자한테 잡혀갔지. 명부에서 염라대왕이 물었겠다. 넌 무슨 일을 하다가 왔느냐? 선율이 대답했어. 소승은 늘그막에 대품반야경을 완성하려고 했으나 끝내지 못하고 왔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했지. 비록 자네의 수명은 다했으나 소망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승으로 돌아가 불전을 끝마치는 게 좋겠구나. 일 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