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에서 역사가 제법 깊다고 하는 도시를 방문하면 로마 시대의 유적 몇 개쯤은 쉽게 만날 수 있다. 비단 서유럽뿐이겠는가. 로마 문명의 그림자는 아나톨리아에서 중동,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과거 로마제국의 영토에 속했던 지역에서 생생하게 남아있다. 바꾸어 말하면 유서깊은 서유럽 도시의 대부분이 로마 시대에 그 연원을 두고있으며, 로마 도시의 바탕 위에서 시대적 변화를 겪어온 것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여러 도시 중에서 로마 도시의 모습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곳을 꼽으라면 프랑스 남부의 아를(Arles)을 첫 손가락에 꼽겠다.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의 여파는 바르셀로나를 탐욕과 타락이 난무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급격히 줄어들고, 극단적 사회주의자들은 교회를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출판사 사장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보카베야(Josep Maria Bocabella)는 속죄와 회개의 뜻으로 성당을 건립코자 했다. 그는 역시 독실한 신자였던 가우디에게 그 일을 담당할 수석건축가의 임무를 맡겼다.가우디는 이 작품을 위임받은 1883년 이래 1926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40여년간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오로지 한 작품에 40년을
한 도시가 재능있는 건축가를 배출하고, 그의 걸작을 갖는다는 것은 도시 전체의 축복이다. 건축적 걸작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적 가치를 갖는다. 단 하나의 건축적 작품만으로도 도시의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고, 역사적 문화적 자산으로서 자부심의 근원이 되며, 핵심적 관광자원으로서 경제적 효과까지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는 에펠탑으로 기억되고, 시드니는 오페라하우스가 먹여 살리며, 다 죽어가던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 덕에 다시 살아났다.바르셀로나는 가우디(Antoni Gaudi;1852~1926)를 배출했다. 그가 없었다면 바르
알 함브라의 핵심부는 13세기부터 조성된 나스르 궁이다. 이는 이베리아에서 마지막 이슬람 왕조였던 나스르 왕조의 왕궁이다. 기독교 세력에 밀려 북아프리카로 쫓겨날 때까지 이베리아 최후의 이슬람 왕궁이라 하겠다. 사라지기 직전이 가장 아름다운 것일까. 유럽의 궁전만큼 거창하지는 않지만, 무어인들의 혼과 기예를 갈아 넣은 이슬람 건축의 절정기를 보여준다. 멀리 중동으로부터 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이르기까지 습합으로 숙성된 이슬람 문명이 이곳에서 황홀한 노을을 남기고 사라졌다.왕궁이라고 해서 특별히 거창한 규모나 위압적 파사드를
인간의 복잡미묘한 서정을 표현하는데 음악만큼 강력한 것이 있을까. 그라나다로 향하는 차창에서 풍경은 보이지 않고, 기타의 선율 하나가 머릿속을 맴돈다. 그 유명한 타레가(F. Tarrega)의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 (Recuerdos de la Alhambra)’, 화려한 기타의 트레뮬로 선율이 슬며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면서 낯선 전설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환상적인 충동에 못 이겨 기어이 비싼 클래식 기타를 사고 말았던 젊은 날의 내 모습도 중첩된다.멀리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설봉이 나타나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산맥에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이슬람군(아랍과 무어인의 연합군)은 불과 3년 만에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며 기독교 세력을 오늘날 프랑스 땅까지 몰아냈다.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에 알 안달루스(Al-Andalus)라는 나라를 세우고, 그 수도를 코르도바(Cordoba)에 두었다. 북부 지방을 제외한 반도 전역이 이슬람의 통치를 받았으며, 그 중심에 코르도바가 있었다.한편 중동의 이슬람 제국은 왕위계승의 정통성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분열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복 전쟁으로 복속된 지역에서 각기
여행을 하다보면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도시에서 놀랄만한 경관이나 유적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여행자로서 그 쾌감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이베리아반도에는 그런 쾌감을 선사하는 도시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세고비아에서 만난 로마 수도교나 신데렐라 성이 그러하고, 론다(Ronda)의 계곡, 몬세라트(Montserrat)의 수도원 등이 그러하다. 물론 세간에 널리 알려진 도시가 아니더라도 도시마다 경탄할 만큼 독특한 도시경관과 유산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살라망카(Salamanca)도 그런 쾌감을 주는 도시 중 하나다. 세고비아에서 서쪽으
세고비아(Segovia)는 스페인의 중북부 레온(Leon) 자치주에 속한 소도시다. 마드리드에서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길의 경유지이기도 하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인들이 정착했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서고트 왕국의 기독교인들이 정착했다. 7세기에는 이슬람인들이 진출했으나, 레콘키스타(재정복 운동)로 11세기부터 기독교인들이 재정착했다. 세고비아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양모와 직물 산업이 번창하면서 섬유 무역의 중심지로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오늘날에는 비록 지방의 소도시로 전락했으나, 보물같은 세계적 역사 유산을 3개
북아프리카를 휩쓸고 대서양까지 진출한 이슬람군은 거침없이 지브로올터 해협을 건넜다. 7세기 중반 아라비아 반도를 떠난지 불과 몇 십년 만의 일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 그들은 파죽지세로 서고트 인들을 몰아내며 북진했다. 기독교인들이었던 서고트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지역으로 패퇴해야 했다. 바야흐로 유럽 대륙이 이슬람 세력의 수중으로 넘어갈 역사적 전환기였다.기세등등하게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 땅까지 쳐들어갔던 이슬람군은 뜻밖에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샤를마뉴 대제에게 패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은 유럽의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 이마에 뿔처럼 툭 튀어 나온 곶을 만난다. 건너편의 이베리아 반도가 선명하게 보일 만큼 가까운 곳이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가르는 좁은 해협이 만들어진다. 지브롤터 해협,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물길이며, 지중해의 서쪽 관문이다.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마주 보고 있으니, 교통과 전략적 요충이 아닐 수 없다.일찍이 많은 민족들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쟁투를 벌였다. 이곳은 본래 사막의 유목민 베르베르 족이 살던 곳이다. 그러나 숱한 외부세력의 침탈 속에 주인이 수없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부터 출발한 이슬람군의 헤지라(Hejira; 聖戰)는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북아프리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은 정복한 땅을 식민지로 삼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했다. 오늘날 동부 리비아에서부터, 튀니지, 그리고 서부 알제리에 이르는 땅을 그들은 이프리카야(Ifriqiya)라고 불렀다. 그리고 카이루안(Kairouan)을 그 중심 도시로 삼았다. 원래는 동로마제국의 요새가 있었던 곳인데, 이를 빼앗아 도시를 만들고 서북 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카이루안(Kairouan)은 튀니지에
로마에서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로 향한다. 버킷 리스트에 깊숙이 감춰두었던 신비의 나라다. 미지의 여인을 만나는 것보다 더 설렌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북아프리카의 해안가 풍경은 타잔의 밀림도 아니고, 동물의 왕국에서 볼 수 있는 사바나의 초원도 아니다. 유럽의 지중해 연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곳에 자리 잡았던 문명과 역사 또한 유럽이나 중동에 가깝다. 땅을 중심으로 문명을 이해하려는 선입견이 늘 문제다.역사적으로 보면 튀니지만큼 파란만장한 역사적 과정을 갖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카르타고와 로마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국경도시 아스완에 닿는다. 도시를 감싸고 흐르는 나일강이 호수처럼 넓고 위풍당당하다. 대형 크루즈가 드나들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마리나에는 고급 요트들이 즐비하다. 돛을 활짝 편 펠루카(전통 돛단배)들도 떠다니지만 이국적 풍경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중해의 어떤 항구풍경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나일 살인사건’이 시작되는 무대로서도 손색이 없다.갈수기가 심한 이 지역에서 어떻게 저만큼 풍성한 강물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풍성한 강물의 실체는 도시 외곽에서
기원전 2000년경부터 고대 이집트의 수도로 번영했던 테베(Thebe)는 오늘날 룩소르 근처에 소재했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나일강의 서쪽과 동쪽을 각기 다른 세상으로 인식하면서 도시를 건설했다. 나일강의 서안이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즉 저승세계라면, 동안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승의 세계였다. 이에 무덤은 나일강 서안에, 도시는 나일강 동안에 조성됐다. 하지만 도시 유적들의 대부분은 소멸되어 사라졌고, 신전 건축만이 남아 위대했던 이집트 문명의 역사와 건축을 증거하고 있다.고대 이집트 인들은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다양
카이로를 떠나 룩소르(Luxor)로 향한다. 기차는 나일강을 따라 밤새 남쪽으로 달린다. 아침 햇살에 밝아오는 차창 밖으로 나일강이 따라온다. 사막을 달리던 풍경은 강을 만나며 싱그런 녹색의 수채화로 바뀐다. 강변에는 사탕수수, 밀, 과일, 채소, 야자수 등 짙은 녹색의 생명력이 사막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강 양편에 펼쳐진 농지 폭이 1~2㎞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일 강의 길이를 생각하면 광대한 오아시스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잉태하고 양육한 문전옥답임에 틀림이 없다.밤새 660㎞를 달려 온 기차는 아침 무렵 룩소르에 닿는다.
아프리카의 중부내륙 빅토리아에서 발원한 거대한 강물은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을 건너질러 북으로 향하다가 지중해에 닿는다. 나일강, 6700㎞에 이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나일강을 따라 사막을 적신 강물은 하구에 이르러 강물에 실려 온 충적토를 쌓아 거대한 삼각주를 만들었다. 비옥한 농토에서는 엄청난 농업생산이 이루어져 잉여 생산물이 쌓이고, 이는 나일 문명의 기반이 되었다. 무려 1 만년 전의 일이다.고대 이집트 인들은 나일강 주변에 도시를 건설하고 세력을 넓혀 갔다. 강은 필수적인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제공했고, 수
와디 무사는 페트라로 들어서는 관문이다. 바가지 입장료를 받으면서도 호객꾼들 극성이 시장판을 방불케 한다. 들어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라 걷기가 수월하다. 변화하는 풍경과 간간이 나타나는 유적을 구경하는 데는 걷는 속도가 더 유용하다. 입구에서 10여분 걸으면 협곡이 시작된다. 모래가 깔린 길바닥도 걷기에 편안하다. 기암 괴벽의 협곡 길(siq)이 끝없이 변화하는 공간감을 연출한다. 사막지대에 형성된 붉은 사암의 바위산, 와디럼에서 본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경이로운 예술 조각품이 되었다. 그 길은 자연의 조각을
페트라가 대중적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3- 최후의 성전 편에 등장하는 암벽 사원의 장면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그곳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사용한 성배를 감추어놓은 장소로 등장한다. 물론 허구의 상상력이지만 성물이 감추어진 신비로운 장소로서의 이미지는 공감을 얻을 만하다. 그 장소가 바로 요르단 안에 실재하는 고대 유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신비로움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후 페트라는 요르단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며, 최고의 관광자원으로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다.실상 페트라에는 암벽 사원(알카즈네)만 있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한다. 당연히 예수 탄생지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땅이다. 그 땅에 들어가려면 콘크리트 분리 장벽을 넘어 삼엄한 경비초소를 거쳐야 한다. 외국도 아니지만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경계다. 잔뜩 긴장했지만 의외로 통과 절차는 까다롭지 않다. 관광객들에게는 너그러운 편인가 보다.높이가 5m에 이르는 콘크리트 장벽은 전기 철조망까지 갖추어 마치 교도소의 담장처럼 두 세계를 갈라놓았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이 장벽을 ‘보안장벽’이라 부른다.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장벽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루살렘은 성지다. 문제는 서로 다른 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여러 민족의 성지라는 점이다. 그 거룩한 땅을 지키기 위해, 또는 되찾기 위해 벌어진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수천 년을 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히브리어로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예루샬라임(Yerushalyim)과도 거리가 멀다. 도대체 이 땅에 어떤 ‘거룩함’이 있기에 그토록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것일까.예루살렘성은 그 맞은 편 올리브동산에 올라서야 그 전모를 볼 수 있다. 돌산 경사면에 자리 잡은 도시와 성벽, 그리고 아침햇살에 빛나는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