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 동쪽 폐사지에 가을 햇살이 충만하다. 대종천 상류, 가파른 계곡을 끼고 있는 절터는 이름도 내력도 없다. 8세기 신라 석탑의 걸작인 서 오층석탑, 일층 몸돌 위에 지붕돌만 올려놓은 동탑이 사라진 절집 역사를 전설처럼 풀어낸다. 깨어진 석조 불대좌가 적멸의 공간을 만드는 곳이다.수수께끼로 남은 장항리 절터에 1923년 4월 어느 야밤에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 소리에 모두 잠을 깼다. 부처님 사리를 훔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석탑과 석불을 파괴한 것이다. 석탑은 내려앉고 석불입상도 처참하게 깨지고 무너
서울 홍제천의 옛 이름은 사천 즉 ‘모래내’다. 그곳에 고려 정종11년(1045)에 세운 사현사(沙峴寺)가 있었다. 이름 그대로 모래 언덕 절이다. 사찰의 창건과 함께 오층석탑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사현사 석탑은 제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1970년대 시가지 확장으로 시장과 아파트단지에 절터를 다 내어주고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제 몸 하나 의탁하고 있다.옆자리의 키 큰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개성, 건너편 갈항사지 쌍탑은 경북 김천이 고향이다. 두 탑과 달리 홍제동 오층석탑은 제 본향이 아주 가깝
집에 들어선다. 대웅전이 있어야 할 중심에 단청도 없는 소박한 건물이 예사롭지 않다. 벽송사 선원이다. 기왓장에 쓰인 ‘출입금지’ 아래 연꽃 한 송이 피어 있다. 참선중이라 대나무 발이 드리워진 선방 주변은 고요하다. 지리산 깊은 곳에 자리한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답다. 참배 공간인 원통전은 뒤로 물러나 숨어 있다. 선방과 달리 규모도 작다.벽송(碧松)은 ‘푸른 소나무’다.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지엄선사가 절집을 중창했다. 벽송은 그의 당호다. 벽송사는 억불의 시대에도 고승들의 맥이 이어져 한국 불교를 이끈 대선사들을
모악산 남쪽에 금산사가 있다. 통일신라 때 진표율사가 중창해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이 된 곳이다. 홍예석문을 들어서자 녹음이 짙다. 여름 복판이라 태양은 뜨겁고 매미소리 맹렬하다. 보제루 계단을 올라 절 마당을 들어선다. 금산사의 중심을 이루는 웅장한 두 건물이 넓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화엄의 세계로 들어가는 대적광전과 미륵장육상을 봉안한 미륵전이다.금산사 너른 마당은 석조유물 전시장이다. 여러 보물들이 여기저기서 위용을 뽐낸다. 그 중 육각다층석탑(사진)은 원래 봉천원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다. 대적광전 정면을 살짝 비켜나
거기 강화도에 오층석탑이 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아주 멀다. 한참을 벼르다보니 그리움이 짙어져 뜨거운 여름, 두근대는 마음으로 달려간다.여러 단의 석축을 쌓은 언덕 위에서 오층석탑이 제 몸을 반쯤 드러내고 인사를 건넨다. 오래 기다렸다고.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 마다 풍경이 조금씩 바뀐다. 숲 향기도 짙어진다. 탑이 완전한 모습을 보이자 아, 하고 짧게 숨을 토해낸다. 비어 있는 절터는 정갈하고 내려앉은 바람의 무게마저 삽상하다.오층석탑은 파손되어 흩어져 있던 부재를 수습해 1960년에 다시 세웠다. 투박하다 못해 부자연스럽다.
장맛비가 연일 내렸다. 비도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지 아침 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졌다. 서둘러 가야산 동남쪽 기슭의 경북 성주군 수륜면 법수사지를 향했다. 불교 성지 가야산에는 해인사와 쌍벽을 이루는 가람이 있었다. 802년(신라 애장왕3)에 창건된 법수사다. 절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다 임진왜란 이후 폐사됐다. 전성기에는 천여 칸이 넘는 건물과 백여 개가 넘는 부속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 금당터에서 제법 떨어진 마을 입구에 당간지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짐작이 간다.불교문화를 대표하던 법수사 유물들은 해인사나 경북대 박물관
신라 왕경도를 본다. 왕이 사는 도시 그림이다.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황룡사 구층목탑이다. 기록에 의하면 약 80m 높이의 어마어마한 건축물로 국제도시 서라벌의 랜드마크였다. 황룡사 구층목탑 북쪽에는 분황사 모전석탑, 남쪽에는 미탄사 삼층석탑이 보인다. 목탑과 모전석탑, 그리고 삼층석탑이 남북으로 나란히 있어 마치 여러 양식의 탑 전시장 같다. 장엄한 황룡사 목탑은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고 심초석과 받침석들만 남아있다.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미탄사지 삼층석탑을 향해 간다. 제대로 된 길이
동국대 박물관에 들어서면 눈길을 끄는 보물이 있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납석 사리호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하대의 사리 항아리다. 도굴과정에서 파손되어 그 형태가 완전하지 않지만 명문이 새겨져있다. 가로 세로 칸을 만들어 7자 38행의 글자가 선명하다. 가까이 다가가니 민애대왕으로 시작하는 구절이 보인다. 863년(경문왕 3)에 민애왕의 복을 빌기 위해 탑을 건립한 내력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반듯한 해서체의 통일신라문자를 탐색하는 것은 신기하고 묘한 느낌을 준다.동화사 산내 암자인 비로암 입구에
천년고찰인 문경 희양산 봉암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 등 선지식이 모여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라는 뜻을 세운 봉암사 결사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장소다. 1982년,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했다.봉암사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수행도량으로 부처님 오신날 하루만 문을 연다. 경내는 부처님 생신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북적대지만 분위기는 차분하다. 하긴 일주문만 들어서면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세속을 등지고 돌아앉은 곳이다.하얀색
나주에 사대문이 있다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렇다. 한양 도성처럼 사대문이 있다. 나주는 예부터 호남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은 지방 궁궐이라 불리었다. 금성관을 중심으로 읍성을 쌓고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설치하여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성곽을 비롯한 네 개의 문이 헐리거나 훼손되었다. 다행히 모두 새롭게 복원을 하였다. 덕분에 해자를 두른, 북망문이 건너다보이는 찻집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나주 북망문 밖 삼층석탑은 원래 북문 밖 탑거리에 있던 것을 1
두륜산 미륵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가파른 등산로를 오른다. 초입부터 동백나무가 좌우로 늘어서 호위를 한다. 숲길엔 동백꽃이 통째로 떨어져 붉은 빛이 낭자하다. 서러운 낙화다. 차마 밟을 수 없어 발끝으로 걷다 균형을 잃는 바람에 내 몸도 뿌리째 넘어진다. 옆구리가 아프다. 그렇게 산길을 한 시간 남짓 오르니 북미륵암이다. 숨을 헐떡이며 한 발을 암자로 막 들이는데 얼굴빛 맑은 스님이 먼저 합장을 하신다. 놀라서 얼른 공경의 예를 갖춘다.북미륵암 용화전에는 용화세계에 강림한 마애여래가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 계신다. 집채만 한 바위에 새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다. 광주공원 안의 성거사터. 7m의 큰 키를 자랑하는 고려 초기의 오층석탑이 비에 젖고 있다. 다투어 피던 벚꽃이 눈처럼 흩날려 열반에 들고 바람이 적멸을 부른다. 꽃잎 떨어진 자리마다 제비꽃이 사리처럼 피어 있다. 서너 되는 족히 되겠다.성거사지 오층석탑(사진)은 서오층석탑이라 불리기도 한다. 광주 읍성을 기준으로 반대편 지산동 탑은 동오층석탑이다. 건립된 시기는 다르지만 단층 기단에 오층의 탑신을 올린 닮은꼴로 모두 보물이다. 성거사지 오층석탑이 지산동 탑과 다른 점은 일층 몸돌이다. 몸돌 전체를 아
장터에는 활기가 넘친다. 섬진강변으로 봄꽃 나들이를 왔지만 먹을거리 풍성한 시골장터 구경도 빼 놓을 수 없다. 관광버스가 연이어 들어온다. 지리산에서 시작된 화개천이 섬진강과 합류하는 지점인 화개장터는 화개면 탑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니까 탑이 주인인 동네다.봄이 되면 광양 매화와 지리산 산수유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쌍계사로 이어지는 십리 벚꽃 길도 마찬가지다. 그들 대부분이 화개장터에 들르지만 정작 주인에게 인사는 없다. 삼층석탑 혼자 저쪽 언덕에서 고개를 빼고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궁금해 할 뿐이다. 탑은 숨어 있어 보이지
불굴사의 핵심 공간은 홍주암이다. 아찔한 바위 절벽에 바짝 붙어 있어 그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원효 대사가 최초로 수도했던 석굴로 원효굴이라 부른다. 김유신 장군이 소년시절에 삼국통일을 염원하며 수련을 했던 곳이다. 1976년 석굴 내부를 수리하다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하는 청동불상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이렇듯 역사와 설화가 만나면 큰 힘을 발휘하는 법. 사람들은 오늘도 원효굴을 향해 줄지어 계단을 오른다.불굴사에는 족두리를 쓴 고려 시대에 조성된 약사여래불도 있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과 마주보는 자리다. 원효굴
아침 신문에 봄꽃 소식이 날아든다. 언 땅을 헤집고 솟아난 노란 복수초, 흰 눈을 살포시 인 붉은 동백이 봄을 화들짝 깨운다. 내 안에서 스멀스멀 일어나는 기운을 참지 못해 구미 낙산리 고분군을 지나 논 가운데 의젓한 낙산리 삼층석탑 앞에 선다. 얼었던 땅이 녹아 부풀어 오르는지 발밑은 푹신하게 탄력이 느껴진다. 마을을 둘러 싼 나지막한 산도 봄빛이 연연하다.구미시 선산지역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곳이다. 신라 최초의 사찰 도리사가 자리 잡은 태조산이 멀리 보인다. 그 후광을 받아 오늘따라 높이 7.15m의 낙산리 삼층석탑이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 마제석검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국내 최대 크기의 석검은 경북 청도 진라리에서 발굴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비파형동검도 청도 매전면 예전리 출토품이다. 청동기 시대 무덤의 부장품인 돌칼이나 동검은 강력한 지배층의 등장을 보여준다. 청도는 삼한시대 초기의 왕국 이서국(伊西國)이 자리했던 곳이다. 청도에는 돌칼들이 수없이 발견되었고 지석묘가 대규모로 남아있다.이른 아침, 청도읍에서 풍각으로 이어지는 국도변을 지난다. 지석묘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도로 공사 당시에 돌칼이 수십 점 나온 곳이다. 잊혀
목촌 마을 뒷산으로 비장해 둔 보물을 찾아 간다. 숲과 잘 어울리는 아담한 관덕동 삼층석탑(사진)이다. 석탑에 새겨진 조각들이 오늘따라 도드라져 보인다. 주위를 압도하는 장대한 탑을 만나는 것도 경이롭지만 가끔은 화강암의 화려한 조각 앞에서 마음을 열기도 한다.아래층 기단에 빙 둘러 하늘을 나는 비천상이 있다. 너울거리는 천의를 보고 있으니 꽃구름을 탄 기분이다. 지난밤에는 분명 위층 기단의 사천왕상과 천부상, 그리고 일층 몸돌의 보살들까지 걸어 나와 산중 작법무를 춘 모양이다. 겨울 햇살을 받아 모두 상기된 모습이다. 뒤편 보호각
보문관광단지와 경주월드 맞은편 천군동 들녘에는 두 기의 석탑이 있다. 이중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통일신라의 일반적 형식을 보여주는 쌍탑이다. 8세기 이후, 새로운 변화를 보이는 석탑으로 장엄하고 무게가 느껴진다. 사찰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동네 이름을 따서 천군동 동·서 삼층석탑이라 부른다.보물로 지정된 천군동 탑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함께 간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데 왜 몰랐지?’ 모두 의아해 한다. 경주 시민들도 잘 모르는 문화재다. 천군동 앞으로 보문호를 끼고 수많은 차들이 오간다. 이 길을 지나
“사자가 이렇게 귀엽다고? 이건 백수의 왕이 아니지.” “아기 사자인가 봐. 뒤태가 정말 예쁜데요.”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을 보러 갈 때면 답사팀 회원들은 사자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통일신라 조각기술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만든, 조형미가 뛰어난 구례 화엄사 사사자 석탑의 사자와 비교도 한다. 그럴 때 마다 홍천읍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는 먼 곳을 응시한 채 태연자약하다.홍천미술관 뜰에 놓인 사사자 삼층석탑은 두촌면 괘석리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고려 초기에 건립된 이 탑은 위층 기단부의 네 귀퉁이에 돌사
천태산 영국사를 대표하는 것은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다. 영국사에는 많은 보물이 있지만 은행나무만큼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천년을 훌쩍 넘어 살고 있는 은행나무는 높이 31m, 둘레가 약 11m로 서쪽 가지 하나가 땅에 뿌리를 내려 독자적으로 자라고 있다. 나무도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살면 신령이 깃들기 마련이다. 나라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운다. 그래서 해마다 은행나무님께 당산제를 올린다.천태동천의 등산로를 따라 영국사 일주문을 들어선다. 그런데 거대한 은행나무는 잎을 다 떨군 채 맨몸이다. 사방으로 뻗어 휘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