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리 오층석탑은 구미를 대표하는 문화재다. 그 높이가 10m에 이른다. 석탑을 건립할 당시, 선산 지역 불교의 힘이 오롯이 느껴진다. 무거운 돌을 포갬포갬 얹은 구조물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순한 백성들의 염원을 담아 쌓아 올린 화엄의 세계다. 100여 개가 넘는 석재의 결구 또한 부처님을 향한 신라인들의 간절한 기도였다.죽장사 너른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탑은 기골이 장대하다. 우람한 크기나 굳건한 기상으로 보아 국보로 손색이 없다.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저절로 겸손해져 두 손을 모은다. 목을 한껏 뒤로 젖히고 탑을 올려다본
소양대로 한복판에 칠층석탑이 보인다. 명실공히 춘천을 대표하는 문화재다. 근처에 보물인 근화동 당간지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 큰 규모의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탑은 잘 가꾸어진 작은 공원의 중심에 서 있다. 공원 주변은 고층아파트가 즐비하고, 옆으로 골목길이 이어진 옛 동네가 고즈넉하다.춘천 칠층석탑(사진)을 중심으로 탑거리길 탐방로가 있다. 문화재는 물론 춘천 사람들의 생활공간을 둘러 볼 수 있는 길이다. 한나절 걷기 좋은 코스다. 포니 브릿지, 소양로 비석군과 소양강 스카이 워크도 걸을 수 있다. 춘천의 옛 모
새해 첫날, 해돋이 명소는 소망을 품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나는 동해안이 아니라 경주 남산을 오른다. 지난해는 고단했다. 가까운 몇몇이 예고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 힘든 투병을 시작했다. 코로나를 앓은 후 회복을 하지 못해 반년이 넘도록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가족도 옆에 있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다. 때문에 간절함을 안고 천룡사지 삼층석탑을 향해 남산의 열반골에 발을 들인다.열반이란 미혹과 집착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의 경지다.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적정(寂靜)의 세계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신륵사에는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산문에 들어서자 660년 된 은행나무는 황금빛 영락을 매달고 사방으로 빛을 뿜어낸다. 삼백년은 족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단풍나무는 활활 타오르듯 맹렬히 붉다. 두 나무 사이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육백 살의 참나무도 이에 질세라 후드득후드득 잎들을 마구 떨궈내며 길손을 맞이한다. 관세음보살님이 나투신 듯한 은행나무에 소원지를 매달고 나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든다. 마땅히 절집의 주인인 극락전의 아미타부처님께 인사부터 올려야 하는데 실수를 한 것이다. 맘 편하게 모든 걸 가을 탓으
직지사 탑은 없다. 신라 초기 눌지왕2년(418) 아도 화상이 터를 잡았다는 직지사에는 오층목탑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머리 깎고 출가한 절이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전각들과 함께 오층목탑도 불태워졌다. 지금 직지사에 들어서면 제 고향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은 삼층석탑 4기가 눈길을 끈다. 쇠락의 길을 걷던 직지사가 중창을 거듭하고 사세를 확장하는데 보물로 지정된 정연한 4기의 삼층석탑이 큰 역할을 한 셈이다.경북 문경군 산북면 옛 절터인 도천사에 나란히 쓰러져 있던 석탑 3기는 1974년 이곳 직지사로 옮겨 복원되었다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유리 특별전이다. 황룡사 구층 목탑에 삼천 여개의 유리구슬이 안치되기도 했다. 고대 유리는 부처님께 바치는 귀한 보석이었다. 승안사지 삼층석탑에서 나온 녹유리사리병도 전시되어 있었다. 순간, 잊고 있었던 삼층석탑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망설임 없이 함양 우명리 골짜기로 향했다.승안사지 초입
“댁은 늙지 마시오. 엄청시리 서럽소.”보살은 음료수를 내밀며 온 몸이 아파서 절집 살림도 때깔이 나지 않는다며 늙음을 한탄한다. 월광사지 한쪽을 차지한 작은 절집. 대웅전은 퇴락의 기운이 스며있고 우리가 앉은 요사채도 기우뚱하다. 마당에 핀 여름꽃들이 빛바랜 채 졸고 있다. 영험한 곳이니 늙어 쇠약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해 보라며 두 기의 탑만 덩그러니 남
어둑한 박물관에서 신라의 기와들과 흙내 나는 인사를 합니다. 얼굴무늬 수막새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도깨비기와가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끕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망와입니다. 툭 튀어나온 눈, 커다란 뿔, 날카로운 이빨에 들창코는 두려움이 아니라 친근감을 줍니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방망이만 있으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
“조금 힘이 드네요.” 전화선을 타고 오는 아들의 풀 죽은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생전 제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녀석이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거든요. ‘힘들다’는 말은 잘 웃고 긍정의 힘을 믿는 아들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습니다. 살다보면 주저앉고 싶은 날이 많은 법이라고 말은 했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재봉틀을 돌리던 어머니 옆에서 홈질을 하여 인형 옷을 만들었습니다. 왜 그리 맵시가 나지 않던지 매번 실망스러웠지요. 엉성한 바늘땀이 문제라며 어머니는 연필심만큼 한 땀을 두어야 한다고 연필을 바늘 끝에 대 보였습니다. 바느질자의 제일 작은 눈금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에계계 겨우 고것” 열두 살 내가 자신이 없어 심술을 부리자 그 짧은 한 땀이 백리 길
동해남부선 복선 전철화로 해운대와 송정 사이의 기찻길이 폐 선로가 되었습니다. 해운대의 미포에서 바다로 쑥 빨려 들어가듯 달리다 살짝 비켜 청사포를 거쳐서 구덕포로 빠지는 이 구간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기찻길로 뽑히기도 했지요. 그 철길 4.8㎞가 걷기 코스로 시민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휴일을 맞아 식구들과 기찻길을 걷습니다. 짧은 달맞이재 터널도 통과하지
“쾅! 끼이익-” 천둥치는 소리에 굉음이 더해집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베란다 창문을 엽니다. 집 앞 네거리에 오토바이가 연기를 피우며 누워있고 한 남자가 저만치 나가떨어져 있네요. 서행을 해야 할 곳에서 질주 본능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남자가 천천히 일어납니다. 나는 잠시 멎었던 숨을 길게 토합니다. 헬멧을 쓰지 않았다면 그 남자는
내 꿈은 우리 동네 대양서점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변변한 도서관도 없던 어린 시절, 읽을거리에 늘 목이 말랐습니다. 대양서점은 신세계로 나아가는 드넓은 바다였습니다. 나는 서점의 유리문에 코를 박고 천연색의 표지가 돋보이는 잡지나 서가에 꽂힌 책의 겉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지요. 그런 내 모습이 딱해보였는지 얼굴이 하얀 주인아주머니가 들어오라고 손
슬로시티 신안군 증도의 소금밭은 끝없이 넓었습니다. 그곳에 닿는 순간 소금은 생명의 근원이며 밥과 돈이요, 금보다 귀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캄캄한 창고마다 산처럼 쌓인 소금이 간수가 빠지기를 기다리며 오랜 침묵의 시간을 보낼 리가 없지 않겠어요. 소금꽃을 보셨나요. 염전의 결정지에서 오월의 햇살에 바닷물이 영글어 하얀 메밀꽃처럼 피어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연등을 달았습니다. 동네의 절집에도 산비탈의 가난한 토굴 법당에도 등 공양을 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연등을 다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경북 영천, 팔공산 자락에 숨어 있는 백흥암입니다. 맑은 산사에 등불 하나 밝히는 일은 나를 찾아 나서는 길이 되곤 했습니다. 백흥암은 비구니스님들의 수행도량입니다. 일 년에 딱 두 번 보화루 문이
꺼이꺼이 목놓아 울던 어머니는 울음을 그치자 쉬지 않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다간 밖으로 나가 찻길로 뛰어 들기도 했지요. 나는 그런 어머니를 지켜야 했습니다.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다 키운 딸을 시퍼런 강물이 앗아간 이후 어머니는 반쯤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결국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차를 타고 신작로를 달려 고향을
‘착한오리’는 우리가 찾아간 밥집의 이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한 오리를 굽고 뒤적이고 끓이느라 식당 안은 한바탕 난리였습니다. 매캐한 연기에 목이 컥컥거렸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착한 오리와 착한 돼지, 착한 낙지들을 왜 그렇게 신나게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젓가락을 들고 애먼 부추절임과 나물을 뒤적거렸습니다. 착한 오리는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행가방이 방 한쪽에 놓여 있습니다. 두 바퀴가 허옇게 닳았습니다. 함께한 길이 얼마인데요. 길 위의 시간들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낡고 때 묻은 가방은 모서리도 닳고 아래쪽엔 실밥도 삐죽삐죽 나와 있네요. 왜 아니겠어요. 안데스 산맥을 넘을 때는 고산증세로 빵빵하게 부풀었고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 고원에도 힘겹게 올랐었지요. 섭씨 43
그 여자, 꽃집 주인이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꽤 이름난 꽃꽂이 학원도 운영했지요. 특급호텔 로비의 꽃 장식을 하는 제법 잘나가는 플로리스트이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랑 여고시절 합창반도 같이 했지요. 고음이 맑은 그녀는 소프라노를, 나는 알토 성부였습니다. 어딘지 조합이...
속을 다스리는 중입니다. 끼니때마다 죽을 먹고 있답니다. 작년 이맘때도 고생을 했지요. 백화난만한 꽃 때문이라고 말하면 궁색한 변명일까요. 올해도 느닷없이 한꺼번에 꽃이 피었습니다. 칙칙하던 무채색의 세상이 단번에 온갖 빛깔로 채색이 되어 뒤숭숭했다니까요. 그리하여 분별력을 잃고 생전 탐착하지 않던 먹을거리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습니다. 여러 날 밖에서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