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혜숙 수필가

“댁은 늙지 마시오. 엄청시리 서럽소.”

보살은 음료수를 내밀며 온 몸이 아파서 절집 살림도 때깔이 나지 않는다며 늙음을 한탄한다. 월광사지 한쪽을 차지한 작은 절집. 대웅전은 퇴락의 기운이 스며있고 우리가 앉은 요사채도 기우뚱하다. 마당에 핀 여름꽃들이 빛바랜 채 졸고 있다. 영험한 곳이니 늙어 쇠약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해 보라며 두 기의 탑만 덩그러니 남은 절터를 가리킨다. 바람이 사철 드나들고 달빛 스미는 월광사지는 고비늙은 보살에겐 이미 경계 없는 부처의 나라다.

월광사지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월광태자의 한이 서린 곳이다. 신라에 나라를 빼앗기고 가야산 아래 작은 절을 짓고 은둔의 세월을 보내다 생의 마지막을 맞이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월광月光. 달빛이 쓸쓸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1450여 년 전, 망국의 임금이 겪었을 가혹함이 어렴풋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합천군 야로면 허허로운 터에는 보물 제129호 삼층석탑이 동서로 놓여 있다. 높이가 각각 5.5m인 두 탑은 모두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얹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석탑 양식이다. 지붕돌마다 살짝 든 네 귀의 추녀선이 경쾌하다. 불국사 삼층석탑과 견주어도 될 만큼 비례가 알맞고 간결한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있다. 서탑에는 노반을 대신하여 둥근 돌을 얹었다. 절터 옆을 흐르는 모듬내에서 거친 물살에 모서리가 닳는 동안 뼈를 깎는 수행정진을 했으니 그 불성으로 탑의 맨 윗자리를 차지했으리라.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두 기의 삼층석탑은 시간의 얽매임을 넘어 해탈의 상징처럼 서 있다. 등이 굽은 소나무가 석탑을 지켜 온지 오래다. 낡은 요사채와 일체가 되어버린 공양주 보살과 젊음과는 무관한 어눌하게 늙은 여자는 무연히 탑을 내려다본다.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일은 가장 자연스러운 우주 운행의 법칙이다. 그런데 묵직한 것이 가슴을 지그시 눌러 끝내 보살이 건넨 음료를 마시지 못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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