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재성 노인이 기록에서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글 밑에 그려 넣어 놓은 문양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두 사람이 엉켜있는 듯한 문양을 찾아냈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이하우 교수에게 직접 물어 볼 생각이었다. 학자들이 문양 하나가 한 문장을 나타내는 해독법에 수긍을 할지는 미지수였다.집에 가까워질수록 조바심이 일었다. 이번에도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어제 저녁에 전화를 두 번이나 걸었는데 왜 받지 않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평상시에는 아
어떻게 생각해 보면 20대에 남의 부인에게 정신이 팔린 김재성 노인보다는 내가 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 같았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멀쩡한 부인을 두고 바람이 났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생각해보니 아찔했다.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사랑은 모든 걸 감내해내야 하는 것이라지만 이것의 실체가 사랑인지 알 수도 없었다. 어쩌면 치매에 걸린 노인의 노망쯤으로 치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내가 노망이 난 걸까? 고속열차가 천지를 흔들며 지나간다. 내 모든 사고의 틀이 엉
“작가님이 쓰신 별의 전쟁에서는 북한에 두고 온 처자식을 그리워하면서도 남한에서 결혼을 다시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지만 멀쩡한 처자식을 버리고 다른 여자를 따라 간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죠. 더구나 임자가 있는 남의 부인을.”김인후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나는 나 자신을 향한 질타로 착각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끌고 가기 위해 일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농담조로 말을 받았다.“그런데 참 인간들이란 알 수 없는 종자들이죠. 도둑질이 나쁜 줄은 다 알면서도 없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남의 돈을 훔치는 놈도 있고 남의 마
“작가님 오늘도 저와 함께 주무시고 가시죠.”나는 안 그래도 다 읽어본 김재성 노인의 기록 내용을 말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김인후는 냉장고 안에 넣어둔 삼겹살을 꺼내어 프라이팬에 구웠다. 마당 한쪽에 쌈으로 남겨놓은 배추 한 포기를 뜯어와 씻어 놓으니 저녁상이 푸짐했다. 저녁을 마치고 김인후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통화 중이었다. 설거지를 마칠 즈음에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설거지를 마친 김인후는 차를 끓여왔다. 불그레한 색깔이 고운 차였다. 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감태나무 잎
쭈글쭈글 주름진 피부는 뼈 위에 간신히 걸쳐 있는 듯했다. 처진 눈꺼풀이 눈동자를 거의 다 가리고 있어 고개를 약간 치켜들고 우리를 바라보았다.“할아버지 저 인후에요. 알아보시겠어요.”김인후가 잠시 마스크를 벗고 맨 얼굴을 보여주었다. 노인은 겨우 큰집 손자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유리문에 가져다 대었다. 김인후도 얼른 손바닥을 유리문에 가져다 댔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104세 노인의 손과 63세 손자의 손이 맞닿았다.“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는데 자주 올 수가 없었어요. 지금 나라 전체가 코로나 때문에 난리에요. 보고 싶
며칠 있으면 대곡박물관에서 특별한 전시회를 하는데 자기에게 연락이 왔다고 했다. 전시회를 여는 사람은 일본인 여류화가인데 출생지가 언양이라고 했다.“이름은 유리라는 분인데 나에게 연락이 온 것은 이분이 우리 작은 할아버지의 딸이라는 겁니다.”나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바로 김재성씨와 부녀지간의 정을 이어온 에리코의 딸이었다. 미술을 전공했다는 이야기는 기록에 언급되어 있었다.“그런데 박물관에서 미술 전시회도 여는가요?”“그분의 그림이 모두 천전리 암각화 문양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네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일본인이 그린 암각
지금 종씨들은 사연댐과 대곡댐에 수몰되면서 각지로 흩어졌다고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대곡댐 근처에 만들어 놓은 망향정에서 모인다고 했다. 그때가 복숭아꽃 살구꽃이 만발하는 봄철이라고 했다. 기다렸다가 그때 참석하게 되면 수몰되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애환을 들을 수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소설감이 엄청 많을 겁니다. 내년 봄에 한번 와 보세요.”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들의 모임이 서석곡에서 이루어져야 아귀가 맞았다. 수몰민들의 이야기는 서석곡의 이야기와는 전혀
김재성 노인의 기록에 마츠오가 붉은 도끼에 찍힌 부위도 오른쪽 이마였다. 어떻게 자연석에 이야기를 전해 주듯 형태와 문양이 만들어 진 것인지 기가 막힌 일이었다.김용삼은 나를 반갑게 맞았다. 인사를 건네자마자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떻게 할아버지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수건에 싸온 붉은 돌도끼를 꺼내어 보여주었다.“알아보시겠습니까?”김용삼은 붉은 돌도끼를 들여다보더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이십 오년 전에 거액을 받고 일본노인에게 팔지 않았느냐고 묻자 더욱 놀랐다.“이걸 어떻게 작
나는 고래잡이 도구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최종적으로 고래사냥을 마치고 몸체를 해부하는 도구로 무엇을 사용했을까 물어보았다. 이 교수는 고고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도구도 없이 멧돼지를 잡아먹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원시인들이 어떻게 사냥을 하고 어떻게 고기를 섭취했는지 몸으로 체험하게 한다고 했다. 학생들은 적절한 자연물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나무와 돌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돌을 깨뜨리면 작은 조각들이 나오는데 그 작은 조각으로 멧돼지의 가죽을 가르는 일이 가능하다고 했다.그런 면에서 미호천 상류에서 나오는 홍
김재성 노인의 일본어 기록물만 그대로 복사해서 약간의 편집만 하면 그대로 한 편의 소설이었다.그러나 기록을 읽고 난 다음, 무엇부터 손을 대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먼저 유촌 마을의 김인후에게 사실을 이야기해 주어야했다. 김용삼에게는 20년 전에 일본 노인에게 붉은 돌도끼를 거금을 받고 판매한 사실이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더구나 김용삼의 할아버지가 기록 속에 나오는 김일환인지도 확인해 보아야했다.무엇부터 손을 댈까 망설이다가 먼저 울산대 이하우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교수는 단번에 나를 기억해냈다. 오히려 왜 이제야
아무도 그날 그가 서석곡에 갔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평시와 다름없이 자신의 모친과 아내가 운영하는 주막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보내고 있었다.형님을 통해서 들려오는 바깥소식에 의하면 미호천에 접하고 있는 하동 중동 상동 마을에 일본인 순사들이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다고 했다. 집집마다 변소까지 샅샅이 뒤져 도난당한 아까마다석을 찾았다고 했다. 어떤 집에서는 한두 점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발각이 되는 바람에 주재소에 끌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고 왔다고 했다.살해당한 마츠오가 아까다마석 광산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나를 의심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면서기가 함께 피습을 당한 사건으로 조사를 하고 있었다.문제는 내가 범인들이 누군지 알고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나는 세 명의 가공인물을 만들어 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물론 세 명 모두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라고 둘러댔다. 일본 순사들의 조사는 수월하게 피해갈 수 있었다. 상처는 쉽게 아물어 갔다.그러나 아물릴 수 없는 것은 마음의 상처였다. 아내 김순조와 마츠오가 바람을 피웠다고 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떤 사정이 있어 백운산에서 김일환과
“김재성씨. 당신도 정신 좀 차리시오. 이놈이 당신 마누라하고 붙어먹은 사실은 알고 있는 거요?”나는 난데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붙어먹다니요?”“그렇게 일본 놈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누라까지 내어 주다니 도대체 쓸개가 있는 거요?”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라 재차 물었다. 김일환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김일환의 말로는 마츠오가 나의 아내 김순조와 백운산 계곡에서 정사를 벌이는 걸 목격했다고 했다.“집에 가거든 당신 마누라한테 직접 물어보시구려. 올봄에 백운산에 산나물을 뜯으러가서 어떤 놈하고
“그 당시 일본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소. 사람이라고 하기 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운 것들이 살고 있었소. 에이시라고 부르는데 당신들 조상들이 모조리 잡아 죽였지요. 더러 데리고 살기도해서 피가 조금 섞이기도 했지요. 당신들은 백제의 유민들이 건너가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미 그 보다 수천 년 전에 건너가기 시작했던 것이오.”“네놈이 죽을 때가 되었나보다. 대일본제국을 욕보이고 천황폐하를 욕보였으니 온전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마츠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김일환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고환을 발길에 차인 김일환은
“그렇소. 일본인들은 더 이상 백운산 아까다마를 캐어가서는 안되오. 그 돌은 우리 조상들의 혼이 담겨 있는 것이오. 백운산 자체가 해를 품고 있는 신령한 산이란 말이오.”“그래서 당신이 일본인 광산 오야지를 두드려 패고 아까다마를 훔친 것인가?”“그건 내가 아니오. 하지만 누가 그랬던 그건 훔친 것이 아니오. 훔치는 것은 일본사람들이오. 이 땅의 물건을 함부로 캐내가는 게 훔치는 것이지요. 자기 물건을 찾아가는 것을 훔치는 것이라 하면 안 되지요.”김일환의 목소리는 매우 단호했다. 마츠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센징이 일본순사
처녀의 오빠는 두 명의 처녀와 신혼 생활을 했다. 그런데도 미호 마을로 시집 간 여동생을 못 잊어했다.처녀의 오빠는 세상 여자들을 모두 다 준다고 해도 시집 간 여동생만은 못하다고 생각했다. 오빠는 여동생을 찾아 서석곡으로 찾아갔다. 사흘이 바위 면에 그림을 새기고 있는 시간에 여동생을 몰래 만나 정을 나누었다. 횟수를 더해갈수록 둘의 만남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사흘은 그런 정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바위그림을 새기다 말고 아내가 기다리는 움막집으로 갔는데 자기 신부가 친정 오빠와 한 몸이 되어 뒹굴고 있었다. 사
마을의 모든 산물은 반으로 갈라 그 반은 공동의 물품으로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으로 내놓은 물건은 나머지 다섯 개 마을이 공평하게 갈라서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여섯 개 마을이 골고루 산물을 나누어 살 수가 있는 것이다.맨 아래쪽 바다를 접하고 있는 고래잡이 마을은 큰 고래를 잡으면 그 반을 갈라 다섯 개 마을에 보내주었다. 그러면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미호 마을 사람들도 고래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반대로 미호 마을의 깊은 산속에서 나는 산물은 그 일 할이 고래잡이 마을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여섯 개 마을은 규칙을
그곳에 별도로 표시된 겹마름모꼴 문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혼자 떨어진 그 마을이 바로 이곳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고래잡이 마을이었다.그들의 생활 방식은 다섯 개 마을과는 완전히 달랐다. 다섯 개 마을이 비옥한 땅에서 곡식을 가꾸고 짐승을 사육하며 때때로 사냥을 하며 살았는데 반해 이 마을은 예전부터 바다로 나가 고래를 사냥하며 살았다.김일환은 이야기를 해나가며 바위 면에 새겨진 문양을 하나씩 짚었다. 그림 하나가 단어 하나가 아니라 문장을 나타냈다. 이어지는 그이 이야기가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김일환이 설명을 하는 동안 마츠오
마츠오의 질문에 김일환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일본은 지금 가나라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고 조선은 세종대왕이 만든 언문을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중국의 글자를 먼저 사용하다 만든 문자라고 했다. 중국의 한자는 물건의 모양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인데 초기 상형문자를 만든 사람들도 초기의 조선인들이라고 했다.마츠오는 중국연안에서 발견되는 상형문자를 조선인들이 만들었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했다. 김일환은 애초에 원시 조선인들이 중국연안에 살았었다고 했다. 마츠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일축해 버렸다.“이따위 낙서가 무슨
허름한 한복 여름바지에 저고리 하나만 걸쳐 입은 김일환과는 대조적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김일환의 차림새는 어김없는 시골촌놈이었다.마츠오는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런 다음 김일환에게는 시큰둥하게 대했다. 김일환은 상관없다는 투로 마츠오를 흘끔 바라보기만 했다.“먼저 와 있었군.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지?”두서면에서 김일환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디 깊은 골짜기에서 농사를 짓는 남자라면 모를 수도 있지만 대로변에서 주막집을 하는 주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때는 김일환이 백운산 골짜기의 홍옥석 광산에서 얼씬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