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경상일보 창간을 지켜보았고 그리고 다시 35년이 지나 1만호 발행을 지켜보는 마음은 매우 감동적이다. 1만의 한 장 한 장이 엮여 이루는 그 긴 역사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 한 장 한 장이 지역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는 말로써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필자 개인적으로도 경상일보의 지면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매우 값지고 뜻깊은 것이었다. 시사 칼럼을 쓰기도 하고 어느 해는 신년 축시를 쓰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일로 지면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던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필자 나 자신에게나 지역사
지난 8월 2박3일간 중국 상해를 다녀왔다. 수교 전인 1989년 8월 공산권 탐방 대학생들을 인솔하는 공동 임원으로서 처음 갔고, 2010년 3월 부산지검 검사장 재직시 상해검찰청과의 교류로 다녀왔으며, 이후 한 번 더 갔으니, 이번이 네 번째다. 갈 때마다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했다. 광복절쯤에 선조들의 독립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장소를 방문하는 일은 늘 감동적이다.상해의 임시정부에 기관지로서 독립신문이 발간되었다. 일제 간섭과 재정 부족으로 어려웠을 텐데 독립의 희망과 애국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신문이 독립운
앞 부분 생략/ 쉬임 없이 해와 달이/ 맑고푸른 바닷물에 씻기어 떠올라/ 온 누리에 빛을 뿌리는 국토의 맨 끝에서/ 정론직필의 빛나는 말씀의 길을 여노니/ 오! 경상일보, 경상일보여!/ 어둡고 적막한 길 위에 화안히 등불을 들고/ 자주와 창의의 피륙으로 짠/ 가장 견고한 북을 울려라/ 무지와 왜곡, 불의와 불신의 담을 넘어서/ 동과 서, 남과 북 편견과 이념의 벽을 넘어서/ 춘추필법의 말씀을 전하라/ 가장 확실하고 가장 빠르게/ 날마다 새롭게 들리는 말씀을 전하라/뒷부분 생략-창간축시 ‘빛나는 말씀의 길을 여노니’ 중의 일부 위
# 1991. 8. 26(월)윤전기를 잘못 구입해 16면이 합쇄(合刷)되지 않는 신생 신문 1면에 게재된 4기 채용 공고를 보고 입사한 첫 날. 바로 직전까지 동강병원 앞 태화강변을 집어삼킨 태풍 ‘글래디스’ 기사를 경상일보를 통해 본 후여서 그런지 신정동 사옥이 신기했다. 활자가 귀한 시절 서툰 사회생활은 교열부, 편집부 등을 거치며 시작됐다.암실에서 흑백사진이 인화되고, 자료실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취재기자의 손 글씨로 출고된 기사가 각 데스크와 편집부의 손을 거쳐 전산실에 넘어가면 신문이 만들어진다. 돌아가신 최정식, 백종
35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개월 수는 420개월이고, 주는 1820주이며, 날은 자그마치 1만2775일에 달한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니 세 번은 더 바뀌는 긴 세월이다.조용필에게 35년은 ‘긴 무명, 긴 스타덤’을 의미하고, 직장인에게는 채용 후 은퇴까지 젊음을 갈아 넣은 기간이며, 일제강점기 35년은 일제의 탄압과 우리의 저항을 의미한다. 1989년에 태어난 사람은 올해 35세가 되어 직장에서 꽤 전문성을 쌓았을 것이고, 결혼과 자녀 출산을 고려하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 이를 것이다. 35년 정도가 지나면 사회의
내가 경상일보를 구독한 것은 창간호부터다. 첫 칼럼도 경상일보가 창간한 1989년에 실렸다. 내 스크랩북에 담긴 ‘교정을 거닐며’(1989년 6월1일)라는 제목의 글이 그것을 말해준다. 창간 2주년에 ‘함월산, 목도 그리고 암각화’라는 축시를 게재함으로써 경상일보와의 연이 이어졌다. 문화부 기자들과 어울리면서 신문의 꽃은 문화면이라는 의견에 적극 찬동했다. 그들의 호의로 여러 편의 칼럼과, ‘시가 있는 월요일’이란 시평을 1년간 연재했다. 이후 글의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경상일보에는 문화부 친구들이 많다.곽
경상일보가 지령 1만 호를 맞았다. 경상일보 창간에 직접 참여했던 필자에게 지령 1만호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대학 졸업 후 반백 년 가까이 기자의 길을 걸었던 필자가 지금도 언론인으로 가장 큰 자랑이 있다면, 경상일보 창간호 1면 머리기사를 직접 쓴 것이다.우리나라 언론사 시작은 대체로 동아와 조선이 창간했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로 본다. 이후 많은 신문이 출간되고 기자가 배출되었지만, 지령 1만호를 넘는 신문의 창간호 1면 머리기사를 쓸 행운을 가졌던 기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창간 무렵 울산시청에 출입했던 필자는 직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