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포 포경역사 다룬 ‘남근과 칼’
장생포 고래박물관 설립에 큰 영향
‘이예, 그 불멸의 길’은 책으로 출간
뮤지컬 공연·‘이예로’ 명명 계기도
1989년 창간호부터 1만호 발행까지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헌의 역사’
정론직필로 찬란한 미래 꽃 피우길

▲ 이충호 작가 전 울산예총회장

1989년 경상일보 창간을 지켜보았고 그리고 다시 35년이 지나 1만호 발행을 지켜보는 마음은 매우 감동적이다. 1만의 한 장 한 장이 엮여 이루는 그 긴 역사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 한 장 한 장이 지역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는 말로써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경상일보의 지면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매우 값지고 뜻깊은 것이었다. 시사 칼럼을 쓰기도 하고 어느 해는 신년 축시를 쓰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일로 지면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던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필자 나 자신에게나 지역사회에 가장 뜻깊었던 것은 두 차례에 걸친 장편소설을 연재했던 것이다.

신문의 장편소설 연재는 문화면의 꽃이라 할 만큼 인기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신문 연재소설은 하나의 트렌드였고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신문을 창간하고 연재소설을 기획한다는 것이 여건상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인데도 경상일보는 창간 초기에 연재소설을 기획해 소설가들에게 지면을 할애해 주었다.

필자의 첫 번째 소설 연재는 장생포 포경 100년사를 다룬 <남근(男根)과 칼>이란 소설이었고 1995년 6월에서 1996년 5월까지 일 년 동안 1일 연재하였다. 그 제목부터가 특이하여 시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었는데, 그것은 선사시대 고래잡이의 시원이 새겨져 있는 반구대 암각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암각화 우측 상단의 남근상과 고래의 등에 나 있는 칼의 흔적에서 따온 것이다. 이 소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큼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

▲ 경상일보 연재소설 ‘이예, 그 불멸의 길’(왼쪽)과 장생포 고래박물관 전경.
▲ 경상일보 연재소설 ‘이예, 그 불멸의 길’(왼쪽)과 장생포 고래박물관 전경.

개도 만원권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황을 이루었던 장생포의 포경산업이 1985년 국제포경위원회의 모라토리엄으로 황혼을 맞고 꼭 10년이 되는 해에 쓰게 된 소설이었다. 상실감에 젖어 있던 장생포 사람들에게는 지난날의 영화와 추억을, 고래를 동경해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지난날의 역사와 전설을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 쓴 소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목적은 장생포 포경 100년사를 생생하게 소설로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이 소설은 연재 때부터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지만, 연재가 끝나고 그 내용을 더 보완하여 쓴 소설이 제6회 한국해양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고 장생포의 포경사를 한국해양문학의 중요한 한 대목으로 남기게 되었다.

이 소설의 힘을 빌려 필자가 처음으로 ‘장생포 포경박물관’을 세우자는 제의를 했고 경상일보를 선두로 여러 신문에서도 적극적인 호응을 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부터 포경박물관 건립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고 마침내 시민들의 호응으로 장생포 고래박물관이 세워지게 되었다. 비록 포경박물관은 아닌 고래박물관이란 명칭으로 태어났지만 그 원형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장생포 고래문화의 여러 국면들이 경상일보 지면이 선도해 준 영향이 크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두 번째 장편소설 연재는 2012년 10월에서 2013년 6월까지 연재한 <이예, 그 불멸의 길>이었다. 이 소설은 조선 초기 통신사로 대일 외교의 선봉에서 우리나라 외교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이예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었다. 이예 선생는 평생 동안 43차례나 험난한 바닷길을 오가며 667명의 조선인 포로를 송환해 오고, 조선 초기 부국강병의 기틀 마련과 뛰어난 선박 기술의 도입, 국토를 노략질하는 왜구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이 소설 역시 경상일보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연재를 마쳤고 연재하는 동안 독자들의 엄청난 격려와 호응을 얻었다. 이 신문 연재의 힘으로 1년 만에 유명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중판을 거듭하는 성과를 낳았고, 2016년과 2017년에 울산시의 지원으로 그랜드 뮤지컬로 제작되어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각각 두 차례씩 총 4차례의 공연을 하면서 많은 뒷이야기를 남겼다. 최상급의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열연하였으며 4회 연속 만석의 기록을 남겼다. 매회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하는 감동을 남겼는가 하면 주한 일본 대사 일행이 이 공연장을 찾아와서 공연을 관람하고 감사를 표했던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무렵 경주에서 울산을 거쳐 양산으로 이어지는 대로가 개통되게 되어 그 명칭을 놓고 고심하던 때에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시 당국에서 그 도로명을 ‘이예로’로 명명하게 되었다. 거의 일 년에 걸친 신문 연재가 시민들에게 이예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바르게 알린 결과라고 생각된다. 신문에 연재했던 <이예, 그 불멸의 길>은 한 탁월한 선각자의 충직하고 의지에 찬 위국위민의 길이고 역사의 길이었다. 놀랍게도 그 역사의 길이 국토 남단의 한 부분을 종단하는 현실의 길이 되었다. 이예 선생의 그 위국위민의 길이 미래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 길도 불멸의 길이 될 것으로 믿는다.

경상일보의 1만호의 역사는 신문 자체의 영광이자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해온 빛나는 공헌의 역사다. 경상일보가, 우리사회가 중구난방의 여론으로 흔들릴 때 정론직필의 중심 추가 되고, 지역 행정의 오도된 길을 바르게 지적하며, 경제와 문화가 상생적으로 발전하는 길을 선도해 가는 역할을 계속해 주기를 기대한다. 1만호를 다져온 그 단단한 힘이 미래의 찬란한 1만호로 꽃 피워가기를 기원한다.

이충호 작가 전 울산예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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