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위독하는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내려갔다. 간경화 증세로 병석에 누우신 지 2주밖에 되지 않으셨는데 위독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제 56세이신데…. 앞이 캄캄했다. 아버지의 배는 이미 부풀어 오를 대로 올랐고, 얼굴 빛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창백...
향수의 멋은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데 있다. 그런데 때론 엘리베이터 안이나 좁은 실내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향내가 지나칠 정도로 후각을 자극하여 역겨울 때가 가끔 있다. 향수는 마치 자신의 체취가 배어 나오는 것 같이 알 듯 모를 듯 풍길 정도로 사용하면 자기의 개성과 분...
벌써 유월이다. 유월의 바람은 초록빛이다. 도처에서 펄럭이는 나뭇잎 사이로 초록빛이 찬연하다. 길가에 그림자조차도 초록빛으로 보인다. 여름이 온 것이다. 여름을 맞이한 느낌이 갑작스러운 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점점 계절적 감각이 둔해지는 것 같다. 나뭇잎은 갑...
나는 오늘 도서관을 가며 샤를마뉴 대왕을 생각한다. 그의 위대한 선택이 오늘날 프랑스를 지성과 예술의 나라로 만든 주춧돌이 되었으리라.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유럽을 최초로 통일한 프랑크의 황제 샤를마뉴는 고귀한 신분으로 자랐음에도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 그 당시의 ...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이었다. 꼭 동화 속의 그림 같은 조그만 중학교였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부임한 시골 중학교. 대학 다닐 때부터 야간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사로서의 꿈을 키웠던 나는 신규 발령이 났을 때,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에는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예전에는 비행을 저지른 자식에게 부모가 종아리를 쳐 응징하고 교육하는 관습과, 그와는 정 반대로 비행을 저지른 자식으로 하여금 아버지·할아버지의 종아리를 치게 하여 자식을 교육하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말을 이르는 말이다. 요즘은 교통이 발달해서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시절이지만 마음처럼 그리 자주 가지 못한 채 늘 그리워만 하...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의 도서관이었다” 빌 게이츠의 말이다. 도서관, 이 말 한마디만 들어도 우리의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형언할 수 없는 의미로움이 각 자의 가슴마다 수놓여져 있는 공간이며 꿈을 키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이...
출근길은 언제나 바쁘다. 하늘은 흐리지만 며칠째 내린 비로 신록의 나뭇잎은 더욱 푸르고 땅도 촉촉이 젖었다. 오늘은 투표하는 날. 투표소가 가까워 오자 어김없이 가슴이 뛰었다. 언제부턴가 투표 날이 다가오면 항상 가슴이 떨렸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이 될까로 들떴...
나는 진정한 다도인은 못 된다. 차를 다루고 끓이며 마시는 바른 방법의 현상적 의미와 바른 다법으로 얻어지는 진리의 철학적 의미를 모두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힘들게 차 다루는 생산자의 다도 수련 과정은 생략되고, 단순한 소비자 다인으로 차를 끓여 마시는 일을 즐기며...
지난겨울을 생각하면 올 것 같지 않았던 봄이다. 일찍 핀 봄꽃들은 벌써 지고 벚꽃이 만개하다. 꽃피는 봄은 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단발머리 계집아이 때부터 쌀쌀한 봄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꽃을 따고 나물 캐던 시절, 막연한 사랑을 꿈꾸던...
나는 믿지 않지만 팔자라는 게 있단다. 어릴 때 아버지는 내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 있다고 했다. 역마살이란 글자 그대로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떠돌아 다니게 되는 신세를 비유해 말하는 것으로 아는데 농경사회인 이전까지는 살의 성격이 강했다. 이는...
그 남자는 주말이면 빨래를 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이 되면 혼자 빨래를 한다. 아내의 일손을 돕기 위해서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세탁기도 사용하지 않고 그 많은 빨래를 직접 손으로 하는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음에 틀림없다. 토요일...
사회심리학 용어에 ‘디시페이트(dissipate)’라는 게 있다. 팽배해 있는 불만을 분출시키는 돌파구다. 정치적·경제적·사회적·가정적 불만이 팽배했을 때 사건이나 분쟁을 일으키는 행위 등을 디시페이트라 한다.신학기가 되면 아직 친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어수선한 ...
강변 산책길은 탄성재질로 포장한 길로 제법 넓다. 평소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어느 날 그 길의 가운데가 주변보다 색이 엷어진 것이 눈에 띄었다. 그 흔적은 비뚤비뚤 굽어 있었지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길게 뻗어 있었다. 처음엔 비온 뒤 끝이라 오염된 것이 씻긴 것인...
첩첩산중 한 마을에 사는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이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만나는게 산이요, 그 산 속으로 비치는 햇살을 보며 뛰 놀다 저녁이면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해를 보며 잠자리에 들었다. 산 사이로 난 신작로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를 보면서...
아버지는 이미자 노래를 무척 좋아하셨다. 약주라도 한 잔 하신 날이면 어김없이 이미자 노래를 흥얼거리셨는데 기분이 좋으면 흥얼거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온 식구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셨다.식구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주말 저녁, 아버지의 얼굴이 약주로 불그스레 익...
힘든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눈앞에 펼쳐주는 것이 문학이요, 미술이며 음악이다. 기쁨이 크면 슬픔의 그림자도 짙게 따라오고, 즐거움이 크면 괴로움도 큰 것처럼, 국내 최대 규모의 기획사에 소속된 국보급 그룹, 동방의 신이 일어난다는 ‘동방신기’가 매스...
한동안 바람이 제법 부드러워 봄이 오는 것 같더니 며칠 전 겨울이 가는 것이 아쉬운 듯 눈이 또 내렸다. 폭설이다. 울산에 살면서 이렇게 많이 내린 눈은 처음이다. 올 겨울은 참으로 혹독했다. 혹한과 폭설이 자주 내렸고 전국을 불안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구제역 사태가 일...
설이지만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다. 구제역 바람이 매서워 어지간하면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눈물어린 호소와 연일 치솟는 물가가 찬바람처럼 일렁여 고향 가는 길이 마냥 설레지 만은 않았다.“올 때 면사무소 댕겨 오너라, 거기 가서 소독하고 와야 한데이.”설 연휴 하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