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대 시인
아버지가 위독하는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내려갔다. 간경화 증세로 병석에 누우신 지 2주밖에 되지 않으셨는데 위독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제 56세이신데…. 앞이 캄캄했다. 아버지의 배는 이미 부풀어 오를 대로 올랐고, 얼굴 빛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창백했다. 며칠 못 넘길 것 같다는 형님의 말씀에 억장이 무너졌다. 눈도 뜨지 못하시고 바짝 마른 입술로 물만 찾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차라리 우리 자식들에게는 고문(拷問)이었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던가. 아버지는 사력을 다해서 버티고 계셨다. 곧 떠나실 것 같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가슴 졸이면서도 우리는 아버지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터무니 없는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의 끝자락을 붙들고 싶었던 것이 그때 우리 자식들의 심정이었다. 믿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떠날 때가 아니었던 것일까. 아버지는 그로부터 며칠 더 생존해 계셨다. 감았던 눈도 뜨셨다. 적신 물수건을 입술에 갖다 대자 미약하나마 입술을 다시며 움직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가 기적처럼 말을 하셨다. 귀를 입 가까이 갖다 대어야 들리는 말이지만 아버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힘겹게 말씀하셨다. ‘난 쉽게 가지 않으니까 더 머물지 말고 빨리 학교로 돌아가서 수업하다가 연락하면 그때 다시 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나는 한사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비록 3학년 담임이고 진학과 입시 상담으로 경황이 없을 때이지만 아버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세상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강하셨다.

젊었을 때 가정 사정으로 사범대 진학의 꿈을 접으신 아버지께서는 유난히 나에게 집착하셨다. 나만은 반드시 사범대에 진학해야 하고, 교사가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당신의 못다한 꿈을 내가 반드시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런 아버지는 학생들에 대한 교육관도 남달라 내가 조금이라도 학교 생활이나 학생들에게 소홀하다 싶으면 호통을 쳐서라도 일깨우고 자식을 가르쳤다.

교사는 게으르면 안 된다고, 세상이 비뚤어져도 교사는 바르게 서야 한다는 말씀을 잠언처럼 들으며 공부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나로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학교로 돌아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더 이상 주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아버지가 며칠이라도 더 버티셔서 이 못난 자식이 다시 올 때까지 살아 계셔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형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버스를 탔다. 마산에서 진주를 거쳐 산청에 있는 조그만 시골 중학교의 교무실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과 몇 분의 선생님들이 교무실을 지키고 계셨다. 우리 반 학생들도 몇 명 보였다. 교무실로 들어서는 나를 본 교감 선생님께서는 놀람과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방금 마산에서 아버지가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임종을 하지 못한 탓이었는지 그때부터 나는 어느 집에서 곡 소리만 들려도 울컥해졌다. 신문에 누가 죽었다는 기사만 나도 가슴이 아렸다. 교과서에 누가 죽은 이야기만 나오면 수업을 하다가도 목소리가 떨렸다. 최익현의 절명(絶命詩)를 가르칠 때도 그랬고,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낭독할 때도 그랬다. 지난 2월 울산에 폭설이 내린 날, 눈길 교통사고로 차에 탄 동료교사 일가족이 사망했을 때도 며칠 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어언 서른 두 해가 지났다. 지난 달에는 첫 발령지였던 산청의 시골 중학교, 그때 가르쳤던 제자가 간암으로 투병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가 머물고 있는 전라남도 백운산에 다녀왔다. 병원 치료를 포기하고 요양소에 머물고 있는 제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전신이 말라 있었다. 40대인 제자가 50대인 나보다 더 늙어 보였다.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옛 담임 선생님을 마중나온 제자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졌다. 그리고 하늘을 원망했다. 제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빌고 빌었다.

문병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나에게 제자는 들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개망초였다. 꽃을 받아 든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고정희 시인의 시처럼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백운산을 돌아 나오는 5월의 길섶엔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이종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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