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4년에 쓰인 에는 “서민들은 대부분 흙침상으로서, 땅을 파서 쪽구들을 만들어 그 위에 눕는다. 이것은 고려가 겨울이 몹시 춥지만 솜과 같은 것이 적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 방식인 온돌에 대한 기록이다. 난방이 없는 겨울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지금에 고대인들의 겨울나기를 생각하면 얼마나 추웠을까 싶다.온돌은 ‘따뜻하게 데운 돌’
누군가 고고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들의 삶, 우리의 삶을 말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살아온 흔적 그리고 살아가는 흔적을 찾고 연구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최근 함안의 성산산성이라는 유적에 대해 자료를 정리하다가 사람이 산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성산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으로, 신라가 가야지역
봄에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비와 햇볕과 바람과 싸우며 애지중지 결실을 수확하기까지 농부의 애잔한 마음을 감히 짐작해보는 가을이다. 수확의 계절에 ‘우리 선조들은 어떤 농기구들을 썼더라’라는 생각이 든다. ‘(가래 초)’ 글자만 보면 참 복잡하게 생겼다 싶은데 예전부터 정이 가는 글자다.에는 ‘가래(鍬)’라고 쓰고
“다리의 통이 넓고 외형이 직선적이며 절두형이다. 다리에 2단으로 투창을 뚫을 때 아래 단과 위 단을 서로 엇갈리게 하여 사다리꼴의 넓은 굽구멍을 뚫는다.” 고고학사전에 적힌 신라지역 굽다리접시에 대한 설명이다.굽다리접시는 원삼국시대 이후 남한의 대표적인 토기형태로 고대의 무덤과 생활유적을 편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굽다리의 높이, 벌어진 각도, 다리에
부드러움과 유연함. 나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다만 오래도록 단단하게 형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을 테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재료는 변함없이 나무다. 집을 지을 때도 다리를 놓을 때도 도로를 만들 때도 목책을 만들어 적의 침입을 막을 때도 나무는 어느 한 곳 쓰이지 않은 데가 없었다.생활도구나 생산도구도
일 년을 손꼽아 기다리다 맞이하는 여름휴가. 그 꿈같은 여름휴가 때 뭘 챙겨가나 하는 호기심으로 옛사람들의 여름을 살펴보았다. 옛 선비들이야 산천유람도 그 덕목 중의 한가지였으니 지금과는 달랐을 터. 그럼에도 가끔 손에 들고 다니는 물건이 출토되면 옛날 사람들도 이런 걸 가지고 다녔구나 싶다. 그 중 하나가 ‘자라병(扁甁)’이다.마치 자라처럼 생긴 이 병은
문화재를 다루다보면 가치와 품격이라는 두 낱말에서 느껴지는 애매한 혼란에 종종 빠진다. 우리 삶과 밀접한 집자리나 생활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나 도구, 장신구는 가치라는 의미에 더 닿아 있다. 그러다가 같은 시기임에도 전혀 다른 성격의 유구인 무덤이나 사찰 등을 조사해보면 위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는 유물들도 출토되곤 한다. 물론 지금도 품격이 다른 여러 문
“절들은 별처럼 많고 탑들은 기러기 떼처럼 줄을 지었다(寺寺星張 塔塔雁行).” 신라의 수도 경주의 모습을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이처럼 그리셨다. 신라 법흥왕 14(527)년에 불교를 공인한 후 경주를 중심으로 엄청난 불사(佛事)가 진행되면서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상이 조성됐다.남산 자락에는 140여 곳의 불교유적과 100구가 넘는 불상, 수십 기
꽃이 흐드러졌다. 봄을 좇아 나서는 발길은 으레 고즈넉한 고찰에 가닿기 일쑤다. 소리 내어 봄을 외치듯 색색이 핀 꽃들과 우리의 기와는 유난히 조화롭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지 1600년이 넘었다. 우리 문화재를 불교유적과 별개로 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가사자락에 존귀함을 담은 불상, 이끼 입은 석탑, 고색창연한 건물. 화려하고도 멋진 풍광과 문화재들이
몇십 년 전의 기억만으로도 황홀하고 행복할 때가 있다. ‘상원사 동종’을 떠올리는 필자가 그렇다. 상원사 동종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상원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동종으로 국보 제36호이다. 높이 167cm, 지름 91cm이며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범종(梵鐘)으로서, 음향이 맑고 깨끗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대단하고
‘받아놓은 밥상’ ‘밥상을 찬다’ 등 유독 우리 속담에 밥상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다. 속을 들여다보면 밥상이란 결국 ‘복’이라는 말과 연결된다. 자신의 몫이나 복을 가리켜 밥상에 비유한 듯하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한 인간사에 과거나 지금이나 밥상을 받는 일은 대접을 받는 것임과 동시에 목숨을 유지하는 수단이니 얼마나 중요한 의미겠는가.좌식문화가 일반적이었
바람이 고즈넉이 불어오는 정자에 앉아 벼루에 먹을 갈고 천천히 무엇인가를 적거나 그리는 여유와 멋. 현대인들이 꿈꾸는 소위 휴식과 힐링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문인들이 서재에서 쓰는 벼루, 먹, 종이, 붓. 문방사우(文房四友) 또는 문방사보(文房四寶), 문방사후(文房四侯)라고도 불렀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라면 누구나 곁에 두고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을 그렸다. 두 사람은 이름난 화가들이지만 한 조각 내 마음은 그려내지 못하였다. 내가 산속에 묻혀 학문을 닦아야 했는데 명산을 돌아다니고 잡글을 짓느라 마음과 힘을 낭비하였구나. 내 평생을 돌아보매 속되게 살지 않은 것만은 귀하다고 하겠다.” 1796년 조선 정조 때 그려진 서직수 초상(보물 1487호)에 적힌 초상화찬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문득 책을 펼치다가 이 말이 새삼스레 깊이 와 닿는 유물을 만났다.1597년(조선 선조30년) 음력 9월16일 우리의 수군 전함 13척이 일본 수군 133척을 격파한 명량대첩이 있었다. 이순신이라는 장군의 명성과 함께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곳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11년부터 20
그 사람들은 왜 딱 100년 동안만 이 섬을 사용했을까?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울산만의 많지 않은 섬 중 하나로 원시적 아름다움과 미지의 호기심을 담고 있었던 연자도 이야기다. 온산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공유수면을 매립하면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울산 역사의 한 획을 그을만한 문화재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온돌을 설치한 건물지 21동
더우니 여름이다. 당연하다고 여겨야 할 더위가 새삼스레 난감해져 묵혀둔 부채를 꺼내서 슬렁슬렁 바람을 일으켜 본다. 부채 바람은 지나치거나 넘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라 언제라도 참 좋다. ‘부채 보낸 뜻을 나도 잠깐 생각하니/ 가슴에 붙는 불을 끄라고 보내도다/ 눈물도 못 끄는 불을 부채라서 어이 끄리.’ 이 아름다운 시조는 ‘고금가곡’에 적혀 있다.부채의
도시의 변화는 마치 마술을 보는 듯 순식간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몇 개월 만에 찾아간 마을이 통째로 없어져 버리기도 하고, 없었던 길이 생겨 길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다. 급변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울산의 변화와 발전만큼 문화재들도 바쁘게 세상 속으로 나와야 했다.2008년 즈음 울산 북구 연암동과 효문동 일원에 모듈화일반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몇 개 기관이
며칠전 강원도 삼척의 흥전리 사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청동정병 2점이 출토됐다. 천년 만에 세상 빛을 보게 된 청동정병은 옷을 입은 듯 흙을 묻힌 채 아름다움을 흐트러짐 없이 세상에 자랑했다. 통일신라시대의 청동정병이 발굴된 예가 희귀하기에 놀랍기도 하고 손상이나 파손 없이 고스란히 출토되어 경이로움을 더했다.정병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승려의 18물 중 하나다.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 중에 호미 메고…’ 조선 전기 학자 김굉필의 시조 중 한 구절이다. 비오는 날의 잔잔한 여유와 소박한 일상이 오롯이 담겼다. 지금의 우리들은 비오는 날 우산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만 조선 시대는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걸치며 양반들은 갓 위에 갈모나 쓰개치마를 썼단다.우산을 처음 만든 것은 중국이나 고대 이집트일 것으로
지천에 핀 꽃으로 마음이 녹녹해지는 요즘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말로 말문을 트고 꽃구경이라도 가야지라는 말로 봄 인사를 대신한다. 자연이 주는 이토록 고고한 아름다움을 우리 선조들도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을 터. 꽃이나 풀을 새, 곤충과 더불어 조화롭게 그려놓은 그림을 화훼도, 화훼초충도, 초충도 등으로 부른다.화훼도는 조선시대에 가장 왕성하게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