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이도백하의 다관(茶館)에서재스민차 한잔을 마시는 동안별 하나가 찻잔 안으로 들어왔다추우냐?답이 없구나영하 이십도의 눈보라별이란 족속은추워야 더 빛을 뿌리는 법혜산진에서 훈춘으로 가는 밤길에와사등을 파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보라색 등 하나를 살까 망설였는데또 하나의 별이 찻잔 안으로 들어왔다어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뿌리는 것이별의 숙명이라는 것을 안스무살 뒤로나는 내 마음에게어떤 외로움 속에서도홀로 외로워질 수 있다고고요히 다짐하는 버릇이 생겼다별처럼 빛나는 고독곽재구 시인 강연회에 들렀다가 시집 한 권을 받아왔다. 강연 도중 두
절반만 졸인 포도잼을 김치 통에 넣어 준 엄마. 팔순의 엄마가 처음 만든 포도잼에는 뭉개지지 않은 껍질이 많았다. 숟가락으로 골라내다가 긴 젓가락으로 집어내다가, 창가의 조각구름이 다 지나갈까 봐 커다란 냄비에 쏟아 붓고는 핸드 믹서기를 들고 주저 없이 갈았다. 이 뜨거움이 아니라면 어떻게 고집스런 열매를 녹여낼까. 이 불길이 아니라면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만들까. 가스 불 앞에 서서 눅진해지는 포도잼을 저었다. 참 이상하게도 종종 연민은 또 다른 형태의 감옥 같다는 생각이 길어지지 못하게 포도잼은 자꾸 눌어붙었다.살면서 위로가 가
노란 싹을 밀어 올리는 양파가 있었다감자도 아닌데 싹을 옮겨 심어주려는 사람이 있었다눈물을 흘리며 싹싹 비는 양파가 있었다양파를 달래려고 먼저 울던 사람이 있었다감자 대신 꿇어앉아 벌을 서던 양파가 있었다양파보다 더 반질반질한 무릎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양파보다 더 빨리 눈이 짓무르는 사람이 있었다그 사람 때문에 뚝 울음을 멈추는 양파가 있었다양파에게 보따리를 내밀던 사람이 있었다감자들에게 양파는 하고 물어보면저요, 저요 하고 구석이 쏟아져 나왔다붉은 자루 속에 푸른 손이 가득 들어있었다뭇 생명을 가족으로 거둔다는 것집 근처를 돌아다
나는 몰래 집에 사는, 어린 딸아이가 바닷가에서 몰래 들고 와 어느 구석에 놓아둔, 그리고 곧장 잊어버린 돌멩이가 되었고 돌멩이가 둥근 배를 부풀리다 커다란 한숨을 쉬다가,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처럼 냉장고 구석 곰팡이 슨 사과처럼 유행 지난 철학서나 읽으니, 차고 아름다운 말만 고르며 온종일 앉아 있다 보니, 딸아이는 어느새 자라나 책상 옆에 지층처럼 쌓인 문예지 속에서 내 수줍은 얼굴을 찾아낸다.배고프지 않는 저녁, 나도 모르는 새 책상 위에 놓인 돌멩이들처럼 딸아이와 나란히 앉아서 써본다 천천히 썩고 닳아가는 세간 같은 이름들,
엄마가 물러앉아 팔을 가을 하늘만큼 벌리니 아이가 뛰어온다태초의 몰랑몰랑함이 웃으며 자꾸 떠오르듯 뛰어온다너는 점점 커지는 기쁨을 아느냐수초를 닮은 어린 물고기가 더 깊은 수심(水深)을 찾아가듯이어린 새가 허공의 세계를 넓혀가듯이코스모스가 오솔길을 저 멀리 따라가듯이커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기쁨아이가 막 첫발을 떼는 순간을 그린 밀레의 이란 그림이 생각나는 시다. 엄마는 아이의 뒤에 서서 조심히 어깨를 잡아주고 아빠는 어서 오라고 팔을 벌리고 있다. 아이도 아빠를 향해 팔을 뻗었다. 머뭇머뭇하다 마침내 아이가 한 발을
불은 정말 눈물을 흘리는 걸까남자는 눈물을 보기 위해 불을 피워 보았다고 한다허공의 불꽃에물음표를 남길 때움찔, 불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조립식 지붕 위에서 불붙은 용접 모자를 쓰고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를 본 적이 있다쇠보다 더 오그라진, 화상으로 얼룩진 남자의 가슴허리를 또르르 말고 번데기보다 더 정확한 번데기의 자세로 누워있었다119 들것에 실려 새하얀 고치가 되어가고 있었다얼굴을 찡그리고화(火)를 이마 주름에 새기고 있었다불이 울고 있었다남자의 갈비뼈에 불길이 번진다천년을 묵묵하게 서 있던 나무도나무 같은 남자도불을 만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배롱나무를 본다백년 동안 뿌리 내릴 곳을 찾는다는 그늘을 본다시 한 구절이 작게, 굽은 등을 하고내 빈 종이를 들여다본다한 발로 서 있는 새가물에 빠진 바닥을 찍어 올리듯시 창작은 희로애락을 하염없이 써내려가는 일한여름에 활활 타올라 녹음에 불티가 날릴까 다시 돌아보게 되는,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 열흘 붉은 꽃 없다는 말을 너끈히 비웃어 주는 저 석 달 열흘 붉은 꽃.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보는 배롱나무는 오래오래 피는 배롱나무꽃처럼 오래된 인연과 관계를 말하는 것일 거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장사 끝난 죽집에 앉아내외가 늦은 저녁을 먹는다옆에는 막걸리도 한 병 모셔놓고열 평 남짓 가게 안이한층 깊고 오순도순해졌다막걸리 잔을 단숨에 비운 아내가반짝, 한 소식 넣는다죽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하나같이 다 순한 거 같아초식동물들 같아내외는 늙은 염소처럼 주억거리고한결 새로워진 말의 밥상 위로어둠이 쫑긋 귀를 세우며 간다죽 먹는 모습은 되새김질하는 초식동물 같아‘밥 빌어다가 죽 쑤어 먹을 놈’이나 ‘피죽도 못 먹은 얼굴’ 같은 속담을 생각하니 죽이란 근기가 없거나 궁상스러워 보인다는 부정적 의미가 우세한 음식 같다.하지만 사실 죽
이 성문으로 들어가면 휘발유 냄새가 난다성곽 외벽 다래넝쿨은 염색 잘하는 미용실을 찾아나서고 있고백일홍은 장례 치르지 못한 여치의 관 위에 기침을 해대고 있다도라지꽃의 허리 받쳐주던 햇볕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기별이다방방곡곡 매미는 여름여름 여름을 열흘도 넘게 울었다지만신발 한 짝 잃어버린 왜가리는 여태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한성부 남부 성저십리(城底十里)의 참혹한 소식 풀릴 기미 없다시 두어 편 연필 깎듯 깎다가 덮고 책상을 친다오호라, 녹슨 연못의 명경을 건져 닦으니 목하 입추다찜통같은 더위 속 어느덧, 입추다곧 입추다. 찜통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하여 물 위에 공방(空房) 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 것 비우고 나면 귓불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 솜털 뻗는 거라 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참 오랜만에 당신오실 적에는 볼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네 문밖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 귀를 적셔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민낯을 보겠네뜨거운
송사리만 할 때 송사리를 잡으러 강에 나갔다가 수면 가까이 올라온 황쏘가리를 보고 숨이 턱 막혔었다. 특별한 무언가가 된다는 건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다. 강의 내밀한 비밀을 알게 된 듯, 나는 어렵게 잡은 송사리를 놓아주었다.큰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매달려 화천 가는 길, 헤드라이트 불 앞에 장수하늘소가 나타났다가 큰 날개를 퍼덕이며 어둠 속으로 유유히 멀어져갔다. 메뚜기나 물방개에서 느끼지 못한 위엄, 모든 생물에게 경이로움이 깃들어 있다는 걸 남겨주고, 다시는 볼 수 없었다.물속에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육지로 올라와 포유류로
약손가락은 옛날에탕약 젓던손가락이라 해요약 손가락무명지는 무명지,이름 없는 손가락눈에 잘 안 띄는그냥 넷째 손가락나는 넷째요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우리 집 노인이 저도 모르게,열심열심 깨무는 치매의넷째 손가락많이 아프진 말아야지자꾸 깨물리진 말아야지 하며,약처럼 약속처럼 남은 생은당신과 나아보고 싶어요오늘 밤 피가 지나가는 당신 무명지에외반지를 끼우며우리, 이름 없기를피프티오늘 밤 당신이 내 무명지에끼우는 외반지후생의 사랑 같은 사랑의 후생 같은피프티,이름은 없기를거창한 이름없어도 족한 가족사랑가운뎃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에 있
내 안에는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있고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할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있고 할머니에게서 온 것이 있다 어머니에게는 외할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있고 외할머니에게서 온 것이 있다 내 안에는 말이 있기도 전의 영구동토층 아래의 어둠에서 온 편지가 있고 또 그 이전의 일월성신에서 온 편지가 있다 한 사내가 눈 덮인 천산을 등에 지고 내려온다 광주리 가득 말린 물고기를 담은 아낙이 강을 건넌다 두 개의 엇갈리는 길이 꿈의 매듭을 지은 편지가 내 핏속을 돈다, 하여 나는 얼마간 남자이고 얼마간 여자이다 얼마간 바람
건너 바다는 치사량의 색을 벼리는 중 물결은 어떻게 붉은색에서 코발트까지 넘실거리는 파문을 가시광선의 서랍 속에 쟁이었던가 자신이 왜 아름다운지 생각하는 래터럴 라인(어류 촉각기관)이 뭉클해지면 하늘은 바다의 며칠, 햇빛과 바다가 뒤바뀌면서 상형문자에 가까운 백열등 점등이 빨라지니까 바다는 열 마리의 들쇠고래 백 마리의 들쇠고래 천 마리의 들쇠고래의 지느러미와 합쳤기에 파도는 한 마리의 들쇠고래의 뼈이면서 또한 불빛과 종소리가 교대로 솟아나며 고래 울음 위의 노을까지 모두 파도의 명랑이라는 바다온갖 생명체들의 활기 넘쳐흐르는 바다애
밤꽃 냄새가 확 풍긴다솜털 보송보송한, 긴 꽃줄기샛노란 벌레같이 땅을 긴다뼛속은 오그라들어 타들어갔지만다시 보니 점점이 눈부신 등 같다도토리나무 잎사귀에 내린 그것을 나는 줍는다긴 하루는 어디서 오는 것이냐,이제 모두 가버린다 믿었지만사리울산 에돌아 어린 딸 손잡고 왔다소래 가는 샛길 얽히고설킨 그늘 밑에새끼 사슴이 자꾸 숨는다사슴목장, 사슴뿔이 어느새 나뭇가지 모양 자랐다땅가시덩굴이 철조망 덮고산딸기 붉은 등에 먼지가 끼다하짓날 주위 둘러보니 밝지 않은 게 없어일 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 말 그대로 여름(夏)에 이르렀으니(
3월 춘분 무렵산수유꽃 자우룩한 구례 산골짜기 들었다가마음 굽이 노랗게 젖었다4월 곡우 무렵복사꽃 만발한 조치원 어름에서분홍빛이 명치끝으로 꿈처럼 흘러들었다5월 부처님오신날 즈음갑사 가는 길 저수지가에서찔레꽃이 마음의 문고리를 자꾸 잡아당겼다봄 지나면서 누군가 몸속까지 몰래 숨어들어아리게 내 속을 파먹는다파먹힌 도랑으로 흘러가는 강물에무더기로 알록달록 몰려들어물낯을 자꾸 들여다보는 꽃잎들두통과 발열 감당할 수 없구나봄날은 흘러 흘러 까마득하구나봄 지나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의 덧없음낙화유수는 당나라 시인 이군옥이 쓴 시의 한 구절인
줄줄이 꿰인 짐승의 회색 발톱들이반질반질 매끄럽다안데스 라마들은 죽을 때제 발톱이 뽑혀져 악기가 된다는 것을 안다마지막 눈을 감으며 안간힘으로제 생의 기억을 밀어 넣은 발톱의 안쪽이 깊다흔들면오래전에 살점과 물렁뼈가 빠져나간 흔적이착착착 흔들리는 소리흙바람 속을 저물도록 걸었을착착착 찰찰 기억의 껍질들이 부딪치는 소리찰찰찰찰찰소리가 소리를 자꾸 흔들게 만드는 소리그것은 살아서 이룰 수 없는 구음이므로돌아오지 못할 협곡을 맨발로 건너간라마 떼가 물끄러미 이쪽을 돌아본다파란 잉카의 하늘이 짐승의 속눈썹에 젖어있다차르르 차르르르야윈 뒤편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길이 밖으로가
씨감자는 반을 잘라서 묻지자른 곳에 검은 재를 발라서 묻지그리고 잊어먹지공들여 잊어먹지이마를 짚어주고 가던 손을 잊지옆의 흙을 가져와 묻어주던 시간을 아예 잊어먹지아니, 아주 잊어먹지 않을 만큼만 잊어먹지눈매에서 싹이 오르지아주 잊어먹지 않을 만큼만 싹이 오르지, 꽃이 피지잘려나간 반을 흙 속에서 생각하지눈 감고 오래도록 생각하지들키고 싶지 않을 만큼만 공들여 생각하지그 사이 반이 하나가 되지공들여 하나가 되지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마음 가는대로열이 되지공들여 감자 키우듯 공들여 수필도 풀어내수필 쓰는 일을 감자 농사에 빗대어
저이는 어찌 저리 환할까 기웃거리다가, 드디어 비결을 찾았어요. 날마다 맑은 햇살 푸지게 담아 드시더군요. 설거지한 그릇 널어 바짝 말리고는, 마당에 그득히 쏟아지는 햇살 듬뿍듬뿍 받는 거예요.햅쌀보다 맛나고 다디단 햇살들을요.봄에는 봄 햇살, 여름에는 여름 햇살, 가을 겨울에는 갈겨울 햇살, 그릇에 넘치겠지요. 구름 그림자 놀다 가고 바람은 자고 가고 꽃 냄새, 두엄 냄새는 쉬었다 가겠지요이보다 영양가 높은 곡식 달리 더 있을까요. 아무리 비우고 비워도 또 고봉으로 쌓이지요. 위봉산 넘어온 저 햇살들, 자연의 찬란한 햅쌀들.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