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컥 - 정옥선햇살도 외면하는 산사의 극락전에서노인들 기도 한단다 덜컥, 가게 해달라고잠자리 한 숨 고르자 바람이 가만 멈춘다무성하다. 노인은 큰 도서관이나 다름없다. 요즘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노인 활동이 늘면서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크다.잠자리! 서산머리에 고요히 앉아 지난날 생모시 같은 날개를 펼쳐 분주했던
점자 블록 - 윤경희무심코 밟은 바닥이 누군가의 눈이었다손을 내민 듯한 울퉁불퉁한 촉수였다틈 사이 갇혀 있었던 누군가의 길이었다 인도 위 나란히 깔린 노란 선을 밟고 지나왔다.발 밑에서 느껴지는 둥그란 요철들. 알고 보니 빛의 강약 파장을 타고 앞 못보는 이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등대이자 나침판이다.한번쯤 보이는 그 너
저녁버스 - 정강혜저녁 무렵 버스 한 대 힐끔힐끔 절며간다십이 번 확진자가 탔다는 이유 하나고열은 홀로 앓고 가렴 노을노을 부탁해 들릴 듯 말 듯 버스가 정류장을 외면하고 지나간다.확진자의 고통이 전이 되었나보다. 해거름을 놓칠세라 뒤따르는 꽁무니가 힘겹기 그지없다.요즘은 문 밖이 무섭다. 어디에도 안전지대가 없다.이웃
탁탁 - 윤정란꽃 숲에 드는 날은 허물마저 벗어놓고털거나 털리거나 꽃 하나 가슴 하나화창한 어느 봄날에 두 손 탁탁 터는 바람 바람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화려한 꽃밭에 오는 날은 마음을 내려놓고 정갈한 척 하지만 본색을 어찌하지 못한다.느닷없이 여린가지를 이리저리 끌어당겨 세차게 흔들며 핑계도 가지가지다. 몸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 배우식상가 골목 노숙자가 덮고 있는 종이 상자.그 위에 삐딱하게 쓴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시장의 맵찬 눈보라만 그를 가끔, 들춰본다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노숙자가 덮은 종이상자에 쓴 글, 설치미술로 치환된 노숙자의 자필인지, 행인의 장난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이것은 미술작품이므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 이석래얼었던 대지 위로 새싹들이 솟아나고현 닮은 버들가지 물관 소리 소곤소곤봄날은 평화스러운 아침햇살 빛이다 봄은 샘이다. 푸른 이끼 돋는 바위틈에서 퐁퐁 솟아난다.베토벤의 ‘봄 소나타’는 현악기로 재현한 봄의 정취다.도타워진 봄 햇살이 대지를 비추면 나근나근 버들꽃 눈 틔우는 소리, 줄
혈육(血肉) - 제만자부대끼면 금이 가고 멀어지면 살가운 것마음 열어 따뜻하여라 반지르르 윤기도 도는혈육은 세간살이처럼 만져보고 쓸어도 보고소라 껍데기를 귀 가까이 붙여 소리를 듣는다. 윙윙거려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대었다 떼었다 하면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부모와 형제간 곁에 있으면 작
거미 - 신애리그때는 몰랐을 거야 외줄의 기다림을꾸역꾸역 내뱉어 촘촘히 엮은 사슬바람이 덜컥 걸려들었지 눈 밝은 척 귀 밝은 척하다 외줄거미가 줄을 타는 것처럼 삶은 유아기부터 오롯이 외줄에 매달린다.온 신경을 곤두세워 실샘에서 분비된 피브로인(fibroin)을 응축시킨 은실을 뽑아서 그물을 짜듯 치밀하게 살아간다.빈틈
풍수지리 힘 갖춘 땅, 평야 언덕 능선 있어 Geomantic force of this land, level fields, hills, ridges높은 산과 바다 이어 시조비 우뚝 서니 leading mountains down to the sea, to these stones standing tall.빙빙빙 춤을 추어라 시가 살아 노래한다 Bow, circ
눈 내리는 밤 - 오동춘턱을 괸 내 창 앞에 손님이 왔습니다.별들이 다 숨어도 밖은 환히 밝습니다.가슴엔 하얀 추억이 소올소올 핍니다 싸락싸락 포근한 2월의 눈은 반가운 손님이다.가로등도 숨죽이고 두 귀를 열어 조용히 듣는다. 머지않아 봄이 올 텐데, 뭇 생명이 겨울잠을 자는 땅속이 허술할까 봐. 토닥토닥 덮어준다.아무
어머니 - 김승재꽃 피고 새가 우는 일생이 적혀 있다툭 툭 툭 발길질에 벼랑 끝 아픔까지아무도 넘겨볼 수 없는 천길만길 이 물속바다와 어머니는 깊은 인연이라 할까. 아니다. 고단함이 얼기설기 엉켜 당기고 밀면서 하루의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언제나 무사 귀가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바다를 터전 삼는 사람들
그믐달 - 김임순제 눈썹 한 짝을 동쪽 하늘 걸어 두고새벽녘 푸른 자락 기대 누운 누에나방동트면 떠나보낼 그대 속울음 우는 거다서산에 걸려 있는 그믐달은 낫가락 같다. 어둠에 묻혀 비수처럼 하늘 한편에 처연한 맵시로 길을 재촉하는 달, 눈썹-누에는 거듭나기 위해서 쉼 없이 일생의 밤을 짠다.매듭으로 돌려 묶었다 풀어 감
가는 시간 지켜보며(Watching the Hours)-데이빗 맥캔(번역 우형숙)무성한 데 뿌리 뽑혀, 나무 기분 어떨까요 What it feels like to be a tree uprooted, limbs filled with leaves.밤새껏 일출까지 시시각각 달이 가니 All night long the moon’s crossing, one hour
골목길에 쌓인 눈 - 김준하늘을 뛰쳐나온 골목길 하얀 눈이낮은 세상 높이려고 수북이 쌓여있다발아래 밟히는 허물 그마저도 묻혔다 겨울 대지를 덮으려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골목길을 싸락싸락 눈이 내리는 소리만 가득 채운다. 세상의 오류들도 감춘다.낮은 땅을 수북수북 넉넉하게 쌓아 올려 너절한 허물마저 감싸 안으려
안부 - 안주봉산행 길 옷깃에 얹혀 집안에 든 낙엽 하나책갈피로 꽂아두니 틈틈이 안부를 묻네어차피 낙엽 줄에 선 우린 같은 처지라며하필, 한 장의 낙엽이 왜 따라왔을까. 묻지 말자. 화자와 함께 살고 싶어서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귀한 걸음이다.물기 없는 나뭇잎을 버리지 않고 책장 사이에 끼워두고 책을 뒤적일 때마다 안부
겨울 산 - 유설아가만히 바라만 봐도 까맣게 속이 탄다잎새도 꽃자리도 묻어버린 눈보라아흔둘 뼈마디 삭아 어머니, 돌아누웠다 텅 빈 겨울 산은 언제 바라보아도 든든하면서 애틋하다.잠든 듯 깨어있는 듯, 이른 봄 나무를 달래가며 꽃과 잎을 피우게 하고, 무더운 여름은 푸름이 더욱더 짙어져 성숙하게 했다.가을을 급히 보낸 뒤
아내 2 - 신웅순언제부턴가 가슴 한 녘 하현달이 지나간다저녁 길도 보내고 새벽길도 떠나보낸걸어둔 처마 끝 등불 늘그막 내 고향집하현달이 뜨는 가슴 한쪽은 하늘로 치환했다. 보름을 둥글게 넘어온 하현달을 보는 이가 밤늦게 이슬을 맞으며 서성거릴 때 남몰래 달빛을 밟고 가는 사람만이 본다. 서쪽 하늘에 활의 현을 엎어놓은
새벽노을 - 정경화장갑 한 쌍 도로 위에 납작하게 누웠다한날한시 함께 가자던 우리의 약속처럼깍지 낀 손가락사이 붉게 피는 겹동백 동틀 무렵 새벽은 오묘하다 하루를 시작하려 기지개를 켠 노을의 갈기가 붉게 출렁이며 허물이나 새로움을 포근하게 담아내고 있다.삶의 매듭이 무엇일까 힘들고 지친 노동자의 하루는 집을 나선 남루한
염소 - 김나비말뚝에 묶인 듯 내 눈길에 묶여서진종일 언저리를 빙글빙글 맴돌다내 곁에 식물로 선 채 푸른 울음 삼키며 가을이 이미 저만치 가고 있다.염소가 옴~매~애~ 떠나가는 계절을 더욱 재촉한다.말을 잊은 채 바로 그 곁에 오지 못하고 멀거니 서서 바라보는 중이다.염소는 낯선 사람이 다가가자 쳐다보지도 않고 물어보기
화석의 말 - 변현상그러니까 그때는 글도 책도 없었죠,당연히 휴대전화, 카메라도 없었고요증거요 별수 있나요 몸으로 때울 수밖에 문자가 없던 시대, 사람들은 말을 기록할 수 없어 흔적으로 소통했을 것이다.의사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채 매몰됐던 역사 이전 시대의 사물에 후세인들은 화석이라 붙인 이름, 측정한 연대를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