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는 아쉬웠다.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뢰었다. 대신들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임금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이예는 어전에서 물러났다. 며칠 뒤 2월 초하루엔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바람 한 점 없이 하늘은 고요했...
“실라사야문은 지난해 6월 초하루에 제주도 대정에 침범했다가 체포된 왜적의 괴수 소애(蘇崖) 등 49명의 무리와 한 패거리로 밝혀졌습니다.”형조판서는 말이 격앙되어 있었다.“그 내용을 소상히 말해보라.”“지난해 봄에 실라사야문과 돈사야문(頓沙也門) 등 왜적의 괴수 다섯...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다면 백만 대군의 제국도 공허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민은 나라의 뿌리다. 뿌리인 백성이 편하지 못한데 어찌 부국강병의 나라가 있을 수 있겠느냐,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목민관이 어찌 진정한 목민관일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의 목마...
나는 그것을 길이라 생각했다. 길은 누구에겐가 가야하고 누구에게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길의 뜻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길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왜구의 소굴에 끌려가서 뼈가 부스러지도록 고통을 당하며 밤 새워 신음을 토하던 그날 밤에도, 망망대해에...
대자연 앞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들, 역사의 정도와 진실이 왜곡되고 상처받던 시대의 외로움 속에서 내가 한없이 외로웠던 그 순간들엔 나는 스스로를 매질하며 사필귀정이란 그 평범한 명제와 대의란 명분으로 그 외로움을 이겨왔다. 경도에 사신으로 가서 심수암에서 ...
지금 대마도에서 한성으로 돌아가는 뱃길이다. 10월의 늦은 달이 얼음 꽃처럼 허공에 걸렸다. 바다와 달이 서로를 안고 깊어가는 이 밤, 시간은 어느 듯 삼경인데 잠이 오지 않는다. 밤바다는 거저 막막하기만 한데 오늘따라 달빛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구나.내가 너무나 오...
통신사가 일행을 먼저 귀국시킨 뒤 이예는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부분을 타결하기 위해 거의 날마다 사다모리와 협상을 이어 나갔다.“경상도의 삼포에 항거하는 왜인의 수는 종전과 같도록 하되 도주에겐 매년 200석씩 세사미두를 내리도록 하겠다.”“정약하시는 것입니까...
이키 섬의 모포도에 잡혀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미 시사 도노(지좌전)와 사시 도노(좌지전)에 연락하여 데리러 가겠다고 하였는데 소 사다모리가 시사 도노를 시켜 스스로 데려오겠다고 하여 며칠의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마침 교토에 파견되었던 통신사 변효문과 윤인보...
한 명은 체포 중에 반항하며 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도주의 관하가 죽은 자를 끌고 왔다. 죽은 자는 시신으로 보아 아직 젊은 나이였다.“이 자의 목을 베어라.”이예는 냉정하게 말했다. 명을 받고 병졸이 작두를 들고 왔다. 병졸이 죽은 자의 목을 작두 위에 올려...
“거기서 도둑질하다가 격퇴당해 돌아오는 길에 상국의 변경에 이르러 도적질을 할 것을 의논을 하던 중 본도의 사야몬이란 자는 은덕을 입은 조선에 털끝만큼이라도 약탈할 수 없다고 돌아왔습니다만, 본도의 사응포에 사는 시라사야몬(時羅沙也文)와 돈사야몬(頓沙也文)이 죄를 저지...
자칫 일이 잘못되어 왜적들을 잡아오지 못하면 자신이 질타의 대상이 되어 신료들로부터 추궁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 해야 할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감히 누구도 쉽게 자청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이예는 생...
초여름의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6월 초하룻날이었다.왜선 두 척이 전라도 서여서도(완도 여서도)에 나타나서 그 섬에 정박하고 있던 제주도의 공선(貢船) 한 척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명나라 해령위 지방을 약탈하러 갔다 명군에 격퇴되어 돌아오던 왜구들이었다. 왜구들은 ...
숙로들도 처형의 대상이 되었다. 이세 슈고 토끼 모찌요리와 와까사의 슈고 잇시끼 요시쯔라가아가 요시노리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언제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이러한 위협과 공포에 숙로들은 몸을 떨었다.술을 따르는 것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쇼나곤 국의 시녀를 매질...
일본에서 변란이 일어나 국왕(장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족리의교)와 부젠(豊前), 치쿠젠의 슈고 오우치 모치요(大內持世)가 하리마 국(현재의 효고 현 남서부에 해당), 비젠 국, 미마사카 국 슈고인 아카마쓰 미쓰스케(阿可馬豆)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조선 조정에 전해진 ...
“돌아갈 땐 다시 지세포에 와서 허가 문인을 반환하고 도주의 문인을 되돌려 받아 대마로 돌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어에 대한 세(稅)로는 대선에 5백 마리, 중선에 4백 마리, 소선에 3백 마리 정도씩 물리게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되옵니다.”대마도에서 돌아온...
“고초도의 고도와 동도, 서도 세 섬의 안쪽에서만 조어를 허용한다면 그 범위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세 개의 섬 안 내해에서만 조어를 허락한다면 그들이 그것을 지키고 따르겠는가?”“엄격히 규약을 정하여 허용하면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과연 그...
“서여서도라고 했는가?”“전라도 남단과 제주도 중간에 있는 작은 섬이옵니다. 완도에서 백여 리 그리고 청산도에서도 수십 리나 떨어져 있는 무인도로 해안선의 길이가 25리나 되는 섬이옵니다. 삼포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대마에서도 그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전라도의 여...
세종 22년(1440년) 경신 2월 부산포에 머물러 사는 왜인 후지사부로(藤三郞) 등 39명이 양식을 받아내기 위해 모의하고 대마도 슈고 소 사다모리(종정성)와 소 시게나오(종무직)의 고위 관리들이 나왔다고 허위 보고를 한 것이 발각되었다. 조정에선 이들을 조사하여 대...
“고기잡이배가 입항할 수 있는 곳을 추가로 허용해 주지 않으면 섬사람들이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이곳 인민들의 사정이 딱하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포구의 추가 허용은 두 번 다시 말하지 말라.”하나를 양보해 주면 또 다른 하나를 요구하는 것이 왜인이었다. 이러한 왜인들...
“그들에게도 도주의 문인이 없으면 접견를 허락하지 말라는 말 아닌가?”“그러하옵니다.”대마도주인 소 사다모리는 문인을 이용하여 각처의 사신들을 통제하고 문인 발행에 대한 수수료를 받는 등 대마도 내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