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충호 그림 이상열

일본에서 변란이 일어나 국왕(장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족리의교)와 부젠(豊前), 치쿠젠의 슈고 오우치 모치요(大內持世)가 하리마 국(현재의 효고 현 남서부에 해당), 비젠 국, 미마사카 국 슈고인 아카마쓰 미쓰스케(阿可馬豆)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조선 조정에 전해진 것은 세종 23년(1441년) 12월 3일이었다. 대마도 도주 소 사다모리(종정성)가 보낸 망고시라(望古時羅)에 의해서였다.

요시노리의 공포정치에 위협을 느낀 미쓰스케가 자택에 요시노리를 초대하여 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요시노리를 벤 변란이었다.

소 사다모리가 보낸 망고시라가 경상도 좌도 처치사 김효성에게 와서 알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 국왕이 우서(友壻) 오우치 모치요(大內持世)와 더불어 아카마쓰 미쓰스케(아가마두)를 죽이기를 꾀하였는데, 아가마두가 이를 알고는, 그의 저택에 자객을 숨겨 두고 왕과 오우치 모치요를 초청하여 술을 대접하였는데, 술이 서너 차례 행하다가 일부러 사나운 말을 집 뒤뜰에 풀어놓고 달아나는 말을 잡는다는 핑계를 대고 문을 닫고 나오자 복병들이 덮쳐 요시노리 국왕을 죽였습니다.

오우치 모치요가 담을 넘어 달아나자 복병들이 추격하였고 오우치 모치요는 그의 호위 군사를 동원하여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죽었습니다.

요시노리의 장자가 국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나이가 열두 살이고, 오우치 모치요는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인 그의 당질(堂侄) 오우치 노리히로(大內敎弘)가 뒤를 이어 슈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일본 막부를 섭정하고 있는 새 국왕의 외삼촌인 산지온(山知溫)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아가마두를 토벌하러 나섰으나 병력이 적고 약하여 패하고 말았습니다.”

요시노리의 암살은 이미 예견되어온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폭정에 대한 불만과 우려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선왕 요시모치(족리의지)가 죽고 숙로들에 의해 쿠지(추첨)로 쇼군에 뽑힌 요시노리는 자신이 신의 뜻에 의해서 쇼군에 뽑혔다는 자의식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왕권신수설적인 생각에 젖게 되었고 그의 정치 행각이 매우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다.

요시노리는 정무의 작고 큰일을 결정할 때도 때때로 쿠지에 따르자고 주장했다.

그는 변경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무력으로 토벌하고 무단주의를 행했다. 숙로들이 극력 반대했지만 무단주의는 더 강화되었다. 그 결과 그를 반대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그가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부 슈고가 반란을 일으켰고 야마토의 코꾸진 오지씨와 하시오씨와 엔라꾸지(연력사)의 승병들이 막부의 잘못을 규탄하며 봉기하였다.

이에 요시노리는 공포정치와 탄압으로 대처했다. 이에 반발은 더 커졌고 엔라꾸지 승려가 중당에서 농성하다 불을 지르고 자살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요시노리의 동생인 다이까꾸지(大覺寺)의 승려인 기쇼(義昭)와 모찌우지가 마저 막부에 반대하는 진영에 가담하게 되었다.

요시노리의 이러한 행태는 날이 갈수록 더 강화되었다. 무차별적 탄압과 처형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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