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충호 그림 이상열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다면 백만 대군의 제국도 공허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민은 나라의 뿌리다. 뿌리인 백성이 편하지 못한데 어찌 부국강병의 나라가 있을 수 있겠느냐,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목민관이 어찌 진정한 목민관일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의 목마름을 너희가 이루어준 것에서 희열했다. 그것은 너희가 비로소 너희들의 길에서 이 나라에 그리고 너희들 스스로에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인생의 절반을 집을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가 스스로 배우고 익혀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관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던 날 나는 오늘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것은 너의 자랑스러운 성취였다. 스스로 이루어낸 그 힘에 나는 비로소 안도하며 오늘처럼 깊어가는 밤에 홀로 서 있었다.

종실(李宗實, 세조때 통신사, 증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도 마찬가지다. 무과에 급제하여 바다를 지키는 일에 나서서 이제는 다시 대일 외교의 길에 들어선 것이 장하고 듬직하다. 너가 있어 이 나라의 바다가 안전하다면, 너를 바쳐 이 나라를 지켜준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용장은 덕장이다. 진정한 용맹은 덕으로 완성된다. 대대손손 너희들의 지혜와 덕과 용맹함을 전하고 이어가라. 그것이 너희를 위하는 길이며 동시에 국가를 위하는 길이다. 언제나 기억하라. 만백성의 이 나라를 위해 너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너희가 지켜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한 시도 잊지 말라.

말했다시피 가장 두려운 적은 너 자신이고 너를 해치는 가장 큰 흉기는 너 자신의 말이다. 너 자신에게 너가 성실하지 못할 때, 너 자신 앞에 너가 꼿꼿하지 못할 때 어느 누구에게도 성실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정직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다 부족한 존재다. 타인은 너그럽게 용서하라. 그러나 너 자신에게는 준엄하라. 그것이 곧 미완성인 너를 이끌어 가는 마음속에 한 줄기 산맥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사행길이 나의 마지막 길이란 것을 안다. 날은 스스로 저물어져서 새날이 오듯이 저물어서 어두워진 나의 길 너머로 새날이 와서 너희들의 길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제 이 바다에도 너희들의 새날이 올 것이다. 그 길을 아끼고 사랑하라. 너희가 너희 자신의 올바른 길이 아닐 때 어찌 다른 사람의 길이 될 수 있겠느냐.

나라의 길, 만백성의 길, 그 길을 지키고 빛나게 하는 것이 관리의 길이며 위민보국의 길이다.

이번 사행 길은 내가 자청했다. 내가 책임지고 마무리지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창에 갇힌 채 압송되고 있는 왜구들의 신음소리가 바람결에 가끔씩 들린다. 포승에 묶인 채 잠들어 있는 왜구들의 모습에 인간으로서 연민도 없지 않다만 국법이란 단호해야 하는 것. 나라의 일은 감상일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마음에 새긴다.

아 그렇구나. 이 밤은 내가 울주 지주사 이은을 따라가서 잡혀있던 그 소금창고의 창살 너머로 넘실거리던 그날만큼이나 달빛이 애처롭구나. 이 만경창파에 홀로선 뱃전에 달빛이 푸르고 서늘하구나 아범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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