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싹을 밀어 올리는 양파가 있었다
감자도 아닌데 싹을 옮겨 심어주려는 사람이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싹싹 비는 양파가 있었다
양파를 달래려고 먼저 울던 사람이 있었다
감자 대신 꿇어앉아 벌을 서던 양파가 있었다
양파보다 더 반질반질한 무릎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양파보다 더 빨리 눈이 짓무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때문에 뚝 울음을 멈추는 양파가 있었다
양파에게 보따리를 내밀던 사람이 있었다
감자들에게 양파는 하고 물어보면
저요, 저요 하고 구석이 쏟아져 나왔다
붉은 자루 속에 푸른 손이 가득 들어있었다

뭇 생명을 가족으로 거둔다는 것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집 근처를 돌아다니던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가끔 인터넷을 보면 유기견센터에서 포메라니안 입양했어요, 밥 주던 길냥이가 새끼를 낳아 입양했어요, 하는 글이 보이던데, 꼬리 잘린 그 고양이도 누군가에게 ‘간택되어’ 눈에 안 띄는 거라면 좋겠다.

입양이란 누군가를 자신의 가족으로 거두는 일인데,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희로애락을 나누는 식구의 개념으로 확대되다 보니 이처럼 애완동물을 집으로 들이는 일도 입양이라 표현하고 있다. 사실 이 시에서 입양이 사람의 아이를 입양하는 것인지, 애완동물을 입양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양파의 행동을 보니 사람의 아이 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아이를 입양하든 유기견이나 유기묘를 입양하든, 입양은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한다. 눈물을 흘리며 싹싹 빌고, 벌을 서는 ‘양파’가 버틸 수 있던 것은 먼저 울던 사람의 친절이다. 양파에게 보따리를 내미는 일은 연민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양파는? 하고 불렀을 때 저요, 저요 하고 쏟아져 나오는 양파들. 그 간절한 눈빛. 그들 모두에게 매튜와 마릴라에게 입양되어 조잘대면서 마차를 타고 가는 빨간 머리 앤 같은 행운이 있기를.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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