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민 시인
첩첩산중 한 마을에 사는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이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만나는게 산이요, 그 산 속으로 비치는 햇살을 보며 뛰 놀다 저녁이면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해를 보며 잠자리에 들었다. 산 사이로 난 신작로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를 보면서는 저 버스가 가는 마을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이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들이 있을까, 아니면 교과서 속에서 본 우람한 빌딩들이 있는 도시를 만날 수 있을까. 그 소년이 상상하는 낯선 풍경이 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 소년에게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늘 보던 계단 논에서 일하는 이웃집 아저씨에게 인사하고 늘 보던 조무래기 친구를 만나 학교를 가고 바람 빠진 물렁 고무공을 쫓아 죽어라 운동장을 뛰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지쳐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을 맞으면 여전히 산들은 우람하게 서서 소년을 맞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그 소년은 국민학교 5학년 가을을 맞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한 첫날, 그는 교문을 들어서며 여느 때같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며 오른손을 가슴에 척 붙였다. 그리고 국기게양대를 쳐다보는데 낯선 풍경 하나가 소년의 가슴을 뛰게 했다. 펄럭이는 국기게양대 아래편 화단에 웬 젊은 남자 분이 서성이는 것이었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 분명했다. 소년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좀 더 자세히 그를 보기 위해서 있는 힘껏 뛰었다. 가슴이 울렸다.

계단 아래서 본 그 모습은 눈이 부셨다. 검은 바지에 날선 주름, 이중 단추가 채워진 자켓이 바람에 날렸고, 날카로운 눈매에 하얀 얼굴, 곧은 머리카락이 부는 바람에 살랑였다. 소년은 얼른 자신을 살펴보았다. 검은 고무신에 헐렁한 티셔츠 하나, 그리고 시커먼 얼굴. 소년은 생각했다. 저 분과 친하게 지내면, 저 분이 담임이 된다면 내가 가보고 싶은 그 세계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선생님은 2학년 담임을 맡았고 그 소년은 방과 후만 되면 그 선생님 주위를 돌았다. 그 선생님은 마을 청년들과 곧잘 어울려 축구를 하고 배구도 했는데 등 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는 모습이 얼마나 근사한지 몰랐다. 그렇게 맴맴 돌기만 하던 그 소년이 6학년이 되었다. 담임이 발표되는 순간 그 소년은 하늘을 날고 싶은 기분이었다.

선생님이 담임이 되셨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실 그 분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 분이 들어오셨다. 이마를 살짝 가린 머리카락을 쓸면서 말씀하셨다. 진한 전라도 사투리를 섞었다.

“열심히 해 보자이, 재미있게 보내고잉”

선생님은 경상도 산골아이의 귀를 뚫어주기 시작했다. 많은 이야기를 수업내용과 섞어 들려주었다. 단 한번도 보지 못한 바다와 갯벌, 그 속에서 캐 올리는 바지락과 낙지 이야기, 무안과 목포 앞바다에서 금방 건져 올린 해물을 우리 입으로 전해 주었다. 소년은 입맛을 다시고 그 해물을 귀로 먹었고 머리로 먹었다. 그리고 낯선 도시를 머리 속으로 그렸다.

지친 오후가 되면 무서운 옛날이야기로 더위를 가시게 했다. 그리고 이미자의 ‘목포의 눈물’을 함께 불렀다. 사공이 모는 배를 타고 싶었다. 삼학도, 유달산을 꼭 가보고 말리라 소년은 생각했다.

그 소년은 학교 가는 길이 즐거웠다. 교과서 속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낼 뿐만 아니라 소년이 동경하는 세상 이야기를 던질 때 마다 소년의 꿈은 부풀었다. 매일 여행하는 기분으로 학교를 다녔다.

선생님은 같은 학교에 계신 여 선생님과 사랑을 했다. 그 사실을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 아이들이 알까 봐 내내 비밀로 하기로 스스로 마음먹었다. 그 비밀이 들킨다면 내가 하는 첫사랑을 들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선생님은 세상을 보여 주셨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졸업과 함께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먼 훗날 선생님을 반드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선생님 또한 소년의 졸업과 동시에 전근을 가셨다. 소년은 언젠가 선생님을 만나면 선생님 덕분에 세상을 알았고 선생님 말씀으로 자랐다고 꼭 말씀 드리리라 생각했다.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유달산도 삼학도도 보고 무안 앞바다의 산낙지도 먹었다. 그리고 그 고장에서 교장 선생님이 되신 그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오매, 어디당가?”

선생님이 나타나셨다. 재킷에 넥타이를 조여 매시고, 그 시절 만나서 사랑을 이어오시며 함께 교단에 서 있는 사모님과 함께.

소년이 어린 시절 봐 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김시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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