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창
1989년 창간 이래 척박한 언론환경
일구고 바꾸는데 매진한 경상일보
종이신문의 위기로 어려움 직면
시민들의 변함없는 애정·격려 절실

▲ 이영덕 HD현대중공업 상무

# 1991. 8. 26(월)

윤전기를 잘못 구입해 16면이 합쇄(合刷)되지 않는 신생 신문 1면에 게재된 4기 채용 공고를 보고 입사한 첫 날. 바로 직전까지 동강병원 앞 태화강변을 집어삼킨 태풍 ‘글래디스’ 기사를 경상일보를 통해 본 후여서 그런지 신정동 사옥이 신기했다. 활자가 귀한 시절 서툰 사회생활은 교열부, 편집부 등을 거치며 시작됐다.

암실에서 흑백사진이 인화되고, 자료실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취재기자의 손 글씨로 출고된 기사가 각 데스크와 편집부의 손을 거쳐 전산실에 넘어가면 신문이 만들어진다. 돌아가신 최정식, 백종욱 선배는 확인이 필요 없는 정자체고, 또 어떤 분들은 확인이 어려운 때도 많았다.

이른 아침 연합뉴스의 단말기에서 갓 쏟아져 나온 외신 등 기사를 분류하고, 이런 저런 부서에서 업무를 배우니 6개월이 훌쩍 흘러 수습을 떼는 회식자리 때의 일이다. 동기 9명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1기 선배님들 인솔로 신정동 주점에서 행사가 열렸다. 술에 약한 동기 한 명이 ‘폭탄주’를 마시지 못해 모두 ‘원산폭격’ 후 마셔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 1992. 5. 9(토)

신정동 사옥이 좁아서 당시 대주주인 평창건설이 1992년 건설한 무거동 ‘남운프라자’ 7~8층으로 이사했다. 무거운 철제 책상과 의자를 손수 날랐다. 당시 동기들과 선후배들은 상당수 외지에서 울산에 처음 온 터여서 사옥 이전 후 2~3명씩 무거동 일대에서 월세로 거주했다. 술값, 밥값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배 차지였으며 저녁이면 자취방을 돌며 정을 다지기도 했다.

의욕만 앞선 신문 창간은 금세 경영난으로 이어졌고, 초창기 납입 자본금은 동났다. 급기야 1993~94년에는 1년 넘게 임금이 체불되기도 했다. 어떤 기자는 카드 5개를 돌려막았고, 결혼한 선배들은 형수님들의 벌이로 가계를 꾸려야 했다.

▲ 경상일보 제4기 입사시험(1991년 봄) 장면(왼쪽).  경상일보자료사진
▲ 경상일보 제4기 입사시험(1991년 봄) 장면(왼쪽). 경상일보자료사진

# 1989. 5. 15(월)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울산은 경남의 변방이었다. 울산은 62년 특정공업지구 지정 이후 많은 기업이 들어서고 공해 속에 살면서도 세금만 내고 독자적인 목소리는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부산과 경남지역의 목소리를 대변한 신문만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울산의 정서적 연대감을 모아줄 매개체가 절실했다. 마침 1980년대 후반 언론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 뜻있는 다수의 지역인사들이 신문창간의 뜻을 세우고 인재를 모았다.

이후 울산은 경남의 변방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이 자율성을 가진 자치도시가 되었다. 이후 1997년 7월15일 광역시 승격. 2003년 10월 KTX 울산역, 2009년 3월 유니스트 개교 등을 거치면서 경상일보는 매번 의제를 주도하고 지역민의 중지(衆智)를 결집시켰다.

▲ 가수 조용필이 본사를 방문해 추성태 기자(現 이사)와 인터뷰 하고 있는 장면. 오른쪽은 故 김순태 사회부장.  경상일보자료사진
▲ 가수 조용필이 본사를 방문해 추성태 기자(現 이사)와 인터뷰 하고 있는 장면. 오른쪽은 故 김순태 사회부장. 경상일보자료사진

# 선배들의 희생은 10000호의 마중물이다.

울산시 등 행정기사에 관한한 최고봉 최정식, 깊고 예리하지만 인간적인 정치 전문기자 백종욱, 일본 유학으로 다져진 지혜의 보물창고 이상환, 사회감시라는 언론인 외길을 걷고자 했던 이상주의자 최석권, 풍부한 경륜의 박기선, 노련한 글쟁이 조돈만, 투박하지만 정 많은 김순태, 해박한 지식과 경륜의 이종성 등 수많은 언론인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밖에도 다수의 선후배 언론인들이 후발주자인 지역 신문사 등으로 진출하며 명실상부 울산 언론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시간이 빨리도 흘렀다. 한 세대가 지났고, 과학기술 발전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미디어 환경도 마찬가지다. 최근 몇 년 사이 종이 신문은 더욱 그렇다. 종이신문의 위상이 예전 같지 못하다. 바로 2007년 6월 세상에 태어난 스마트폰이 가져온 여파다. 이전에 없었던 변화다. 불과 17년 만에 천지가 개벽했고 그 변화는 더 가속화하고 있다. 바로 AI에 기인한다.

사람들은 신문 방송을 보지 않는다. 유튜브도 길다며 쇼츠나, 틱톡을 본다. 읽지 않는 것이다. 경상일보도 예외 없으리라.

그렇다면 신문의 미래는 없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미국 뉴욕타임즈와 월스트리트저널은 구독과 매출이 최근 들어 오히려 늘고 있다. 바로 디지털 신문의 성공 덕이다. AI의 대중화로 신문의 독창적인 콘텐츠는 갈수록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경상일보가 지난 수년간 종이신문의 위기로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한다.

부단한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 언론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과 사례는 차고 넘치니 이 자리에서는 생략한다.

독자제현 여러분이나 100만 광역시민들도 경상일보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내주길 바란다. 울산의 현재와 미래를 잇는 창(窓)이 곧 경상일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신산업 전략 수립), 사회(인구 감소, 교통), 문화(문화 부흥), 정치 등을 공론의 열린 광장에서 마음껏 논하자.

창간 이래 황무지나 다름 없던 울산의 언론 환경을 일구고 가꾸느라 정작 자신들을 돌보는데 소홀했다. 지난 30여 년 간 거친 돌밭을 일구느라 지치고 힘들었을 경상일보에 격려와 칭찬, 그리고 무엇보다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다. 오늘 당장 구독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어떨까?

이영덕 HD현대중공업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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