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에는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산문에 들어서자 660년 된 은행나무는 황금빛 영락을 매달고 사방으로 빛을 뿜어낸다. 삼백년은 족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단풍나무는 활활 타오르듯 맹렬히 붉다. 두 나무 사이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육백 살의 참나무도 이에 질세라 후드득후드득 잎들을 마구 떨궈내며 길손을 맞이한다. 관세음보살님이 나투신 듯한 은행나무에 소원지를 매달고 나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든다. 마땅히 절집의 주인인 극락전의 아미타부처님께 인사부터 올려야 하는데 실수를 한 것이다. 맘 편하게 모든 걸 가을 탓으로 돌린다.

신륵사의 다층전탑(사진)은 경내의 동쪽 언덕에 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암벽 위에 건립된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벽돌로 구워 쌓은 전탑이 있다하여 예로부터 벽절이라 불리기도 했다. 보물 제226호, 높이 9.4m인 전탑은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칠층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은 탑신부가 있다. 6층이라고 하나 탑의 층수를 단정 짓기는 매우 애매하다. 수리를 거치면서 형태가 다소 변형되고 안전감이 떨어지지만 신륵사를 상징하는 장중한 깃발과도 같다. 도도히 흐르는 남한강을 한눈에 조망하기 좋은 곳이며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절묘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 배혜숙 수필가

다층전탑의 아래쪽에는 강월헌(江月軒) 정자와 작은 삼층석탑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륵사 부처님은 뵙지 않아도 강월헌만은 찾는다. 남한강변의 가파른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주변 경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아담한 삼층석탑이 있는데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의 공덕을 기려 만든 기념탑이다. 강월헌이 있는 자리는 나옹선사의 다비장소이다.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의 청산가 구절이 물처럼 바람처럼 여강에 넘실댄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자 사람들도 떠나고 어스름이 밀려와 전탑의 긴 그림자마저 지운다. 저녁강물 위로 노을 한 줄기 비껴 잠긴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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