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착한오리’는 우리가 찾아간 밥집의 이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한 오리를 굽고 뒤적이고 끓이느라 식당 안은 한바탕 난리였습니다. 매캐한 연기에 목이 컥컥거렸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착한 오리와 착한 돼지, 착한 낙지들을 왜 그렇게 신나게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젓가락을 들고 애먼 부추절임과 나물을 뒤적거렸습니다. 착한 오리는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상가에는 ‘착한 한우’가 있습니다.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지만 한 번도 들어 가 본적은 없습니다. 착한 한우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핸드폰 가게에는 커다랗게 ‘착한 기변’이라고 붙어있네요. 착한 기기변경이란 뜻이랍니다. 건너편 한길에는 잘록한 허리와 긴 다리, 알맞은 근육을 가진 비현실적인 여자의 그림과 함께 굵은 고딕체로 ‘착한 몸매’를 만들어 준다는 현수막이 너풀거립니다. 학원 창문을 장식한 ‘착한 영어’도 눈길을 끕니다. 세상에 착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착한 식당이 유행어처럼 번지더니 착한 드라마, 착한 거짓말, 착한 소비, 착한 예능이란 말도 공공연합니다.

‘착하다’는 사전에서 보면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한 사람을 이르는 형용사입니다. 사람에게만 쓸 수 있지요. 착하다는 누군가와 교감이 이루어질 때 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 인격체인 사물이나 추상적인 낱말의 앞에 붙어 함부로 쓰이니 억지스럽네요. 속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은 고전을 가르치는 분이셨지요. 나를 착한 학생이라 부르며 모든 학급 일을 맡겼습니다. 아침 일찍 와서 칠판 구석에 한자 숙어를 쓰는 일부터 시작해서 반 아이들의 돈을 걷는 일, 환경미화도 내 책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논문도 대필했지요. 보다 못해 친구가 일격을 가했습니다. 마음씨만 곱고 순종적인 것은 착한 학생이 아니라고요. 사리판단이 따르지 않으면 착한 행동이 남을 해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뾰쪽한 것에 깊이 찔린 듯 아팠습니다.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억울하고 분한 일도 참고 자존심도 버렸는데 정작 그 본질을 몰랐습니다. 슬기로움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착한 식당이나 착한 가격이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착한 드라마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어질고 착한 사람이 많아야 세상살이가 편합니다. ‘착한 한우’ 앞을 지나다 슬쩍 안을 들여다봅니다. 주인의 인상이 아주 순박합니다. 그가 착한 사람이라면 단골이 되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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