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서울 홍제천의 옛 이름은 사천 즉 ‘모래내’다. 그곳에 고려 정종11년(1045)에 세운 사현사(沙峴寺)가 있었다. 이름 그대로 모래 언덕 절이다. 사찰의 창건과 함께 오층석탑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사현사 석탑은 제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1970년대 시가지 확장으로 시장과 아파트단지에 절터를 다 내어주고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제 몸 하나 의탁하고 있다.

옆자리의 키 큰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개성, 건너편 갈항사지 쌍탑은 경북 김천이 고향이다. 두 탑과 달리 홍제동 오층석탑은 제 본향이 아주 가깝다. 주민들이 반환 운동이라도 벌이면 뚜벅뚜벅 걸어서라도 모래내 동네로 돌아가 새롭게 뿌리를 내릴 것 같다. 그렇다면 오래 걸친 외로움이란 외투를 훌훌 벗어 던져 몸은 사뿐하게 가벼워지리라.

박물관 특별전이 열리는 곳은 오늘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단체관람을 온 학생들이 본관 으뜸홀로 무리지어 들어간다. 그러나 야외 석조물 전시장에는 인적이 드물다. 석탑도 제 소명을 잃어버린 듯 시들하다. 깊은 산속, 홀로 빈 절터를 지키는 석탑의 결기도 느낄 수 없다. 보는 나도 신명이 나지 않아 자꾸만 걸음을 멈칫댄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함씬 젖은 오층석탑이 보기에 딱하다. 손이라도 잡아 주려고 한 발을 가까이 들이자 요란한 경계음이 울린다. 문화재 보호 차원이라고 하지만 야박하다. 몸돌을 받쳐주는 넓은 굄돌이 되레 나를 위로한다. 본질이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발 물러나 시간의 비늘이 켜켜이 쌓인 육중한 지붕돌을 올려다본다. 불교가 융성하던 고려 시대, 모래언덕에서 우뚝 빛났을 탑은 중후한 멋을 풍긴다. 먼 나라에서 온, 세계적인 거장들의 그림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고향 잃은 석탑들이 저희끼리 보듬고 위로하며 가을을 맞는다. 기껍고 또 애틋하다. 외로움도 전염이 되는지 으스스 한기가 몸속을 파고든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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