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집에 들어선다. 대웅전이 있어야 할 중심에 단청도 없는 소박한 건물이 예사롭지 않다. 벽송사 선원이다. 기왓장에 쓰인 ‘출입금지’ 아래 연꽃 한 송이 피어 있다. 참선중이라 대나무 발이 드리워진 선방 주변은 고요하다. 지리산 깊은 곳에 자리한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답다. 참배 공간인 원통전은 뒤로 물러나 숨어 있다. 선방과 달리 규모도 작다.

벽송(碧松)은 ‘푸른 소나무’다.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지엄선사가 절집을 중창했다. 벽송은 그의 당호다. 벽송사는 억불의 시대에도 고승들의 맥이 이어져 한국 불교를 이끈 대선사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우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푸른 기운이 넘치던 벽송사는 암울한 시기를 거치며 수난을 당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야전 병원으로 이용되면서 국군의 방화로 완전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그 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원통전 뒤 높은 언덕을 오른다. 넓고 평평한 옛 절터에 삼층 석탑 한 기 오롯하다. 몸집은 작지만 위엄이 느껴진다. 분명 금당이 있고 그 앞에 석탑이 자리했을 것이다. 그곳에 서니 지리산의 수려한 풍광이 쑥 들어와 안긴다. 운거천상(雲居天上), 구름 위 하늘 세계다.

보물인 삼층석탑 곁을 지키는 것은 늘씬한 자태의 미인송이다. 천년을 버티어 내느라 시간의 이끼를 두른 돌탑, 한 곳에 뿌리 내려 온갖 풍상을 겪은 소나무. 모두 애틋하다. 미인송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느라 허리가 굽어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다. 짐짓 무심하던 삼층석탑이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는지 그림자를 미인송 쪽으로 한껏 뻗는다. 나 또한 탑 아래 풀 한포기로 남고 싶은 마음이다.

언덕을 내려오다 도인송 아래 서 본다. 기세가 푸르고 당당하여 사자후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삼층석탑이 저만치 떨어져 도인송을 내려다본다.

배혜숙 수필가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