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함브라의 핵심부는 나스르궁
맥스아르궁·코마레스궁 등 거쳐
사자궁전서 보이는 중정 풍경과
수많은 별 박은듯한 무하르나스
육중한 카를로스 5세의 궁전 등
우아한 내부공간과 디테일 통해
이슬람 건축의 정수 맛볼 수 있어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알 함브라의 핵심부는 13세기부터 조성된 나스르 궁이다. 이는 이베리아에서 마지막 이슬람 왕조였던 나스르 왕조의 왕궁이다. 기독교 세력에 밀려 북아프리카로 쫓겨날 때까지 이베리아 최후의 이슬람 왕궁이라 하겠다. 사라지기 직전이 가장 아름다운 것일까. 유럽의 궁전만큼 거창하지는 않지만, 무어인들의 혼과 기예를 갈아 넣은 이슬람 건축의 절정기를 보여준다. 멀리 중동으로부터 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이르기까지 습합으로 숙성된 이슬람 문명이 이곳에서 황홀한 노을을 남기고 사라졌다.

왕궁이라고 해서 특별히 거창한 규모나 위압적 파사드를 갖춘 것은 아니다. 이슬람 왕궁 건축의 진가는 떡 벌어진 외모가 아니라, 아담하고 우아한 내부공간과 디테일에 있다. 여러 전각과 마당이 겹(layer)을 이루며 배치되었지만, 반듯한 직선 축과 딱딱한 기하학적 질서를 갖는 것도 아니다. 요새라는 제한된 지형과 공간 안에서 여러 영역을 미로처럼 연결해 놓았다. 미로를 헤매면서 갑자기 뜻밖의 풍경을 만나는 것이 나스르 왕궁의 감상법이다.

나스르 궁의 첫 번째 구역은 맥스아르(Maxuar) 궁이다. 이는 궁의 행정기능을 담당하는 구역인데, 본궁 안으로의 출입을 통제하는 대문채의 의미도 갖는다. 하지만 궁전의 중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허름하다. 두 개의 중정을 지나면 접견실(Sala del Maxuar)로 들어선다. 장식들은 다소 퇴락해 옛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지는 않지만. 간드러진 기둥 위에 아라베스크 문양이 망사처럼 장식된 무어식 주두가 왕궁의 시작을 예고한다.

코마레스(Comares) 궁은 나스르 왕궁의 핵심부다. 정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마당을 둘러싼 ㅁ자형의 아케이드에는 늘씬한 허리같은 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치장 벽토(stucco)로 세공한 아치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교하다. 내정 중앙에는 좁고 긴 수로형 수조를 두고, 양쪽에 화단을 조성해 아랍식(페르시아식) 정원으로 꾸몄다. 원형 수반 위에서 나지막이 분출하는 분수에서부터, 긴 수로에 투영되는 아케이드 파사드까지, 애절한 사연을 감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다.

본궁은 탑 형식인데, 왕이 각국의 대사를 접견했던 ‘대사의 방’이 그 중심 공간이다. 높이도, 넓이도 이슬람 궁전 중 가장 큰 공간으로 손꼽힌다. 들어서는 순간 무어인들의 천재적인 장식기법과 마주친다. 바닥부터 광택이 흐르는 세라믹 타일로 치장했다. 벽의 하단은 기하학적 문양의 세라믹 타일, 상단은 소름 돋을 만큼 현란한 치장 벽토 공예다. 벽체 상부의 작은 아치창에는 자수를 놓은 듯 정교한 문양을 투각했다. 천정은 보기 드문 사각형 목제 돔이다. 별과 은하수가 반짝이는 몽환적인 모습인데, 일곱 하늘의 추상적 표현이라고 한다.

▲ 나스르 궁의 걸작 사자궁전. 이베리아 이슬람 건축에서 최고의 걸작이라 일컫는 작품이다.
▲ 나스르 궁의 걸작 사자궁전. 이베리아 이슬람 건축에서 최고의 걸작이라 일컫는 작품이다.

나스르 궁의 절정은 사자궁전에서 볼 수 있다. 이베리아 이슬람 건축에서 최고의 걸작이라 일컫는 작품이다. 중정 중앙에 사자 조각이 받치는 수조가 있다고 해 사자궁이라 불린다. 네 변 모두에 아케이드가 구성되어 있다. 기둥 간격은 좁으며, 가냘픈 기둥을 1~2개씩 배치하고, 다엽형 아치와 스터코 장식은 극도로 화려하다.

아케이드의 압권은 중정을 향해 돌출시켜 만든 포르티코(portico; 현관부)다. 포르티코를 통해 바라보는 중정의 풍경이야말로 놓쳐서는 안되는 알함브라 미학의 절정이다. 아라베스크 패턴으로 장식된 아치 틀이 중정의 사자 수반을 황홀하게 담아낸다.

그러나 무어 건축의 미학적 정수는 역시 내부공간에 있다. 중앙 홀을 거쳐 4개의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누구라도 탄성이 터져 나온다. 치장 벽토로 세밀하게 장식된 벽은 앞서 보았다고 해도, 네 귀퉁이에서 천정을 받치는 펜덴티브 장식은 점입가경이다. 무하르나스(Muqarnas),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아랍 건축요소의 정수다. 벌집형, 또는 종류석형이라고 부르는 이 장식 중에서 단연코 가장 화려한 사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천정의 큐폴라마저 무하르나스로 장식되었다. 영롱한 보석으로 꾸며진 거대한 샹들리에의 모습이다. 수 많은 별들이 모여 큰 별을 형성하며 빛발을 발산하는 16면의 랜턴 큐폴라, 이는 무어인들이 꿈꾸었던 천상 천국의 이미지가 아닌가.

나스르 궁의 미로를 헤매다가 뜬금없이 육중한 건물과 만난다. 바로 카를로스 5세 궁전이다. 기독교 왕조가 그라나다를 탈환(유럽인들의 시각에서는 탈환이라 부른다)한 이후 15세기 초반에 세워진 르네상스풍의 건축이다. 사각형의 건물에 원형 파티오를 갖는 이 건물은 유럽 정복자들의 문명적 열등감을 여과 없이 노출한다.

육중한 석재를 쌓아 만든 벽면은 무표정한 근엄함으로 굳어있다. 원형 파티오는 헤벌어지게 크고 공허하다. 그것을 보완해 주기 위한 도리아식 기둥의 콜로네이드도 신전같은 침묵의 공간을 만들었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건물을 기껏 투우나 검투 경기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나마 완성하지도 못한 채 떠나 버렸다.

알 함브라 일곽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은 알 카사바 요새다. 전함의 뱃머리처럼 언덕 서쪽 끝에 자리해 평원을 감시하는 모습이다. 그리 높거나 위압적이지도 않지만, 강건한 이미지의 성벽과 치성이 견고한 모습의 요새를 만들었다. 장식을 최소한으로 절제해 투박하고 소박한 외관이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다. 육중한 매스들의 스케일과 리듬감이 오히려 근대적이다. 황토 빛 사암의 성벽도 마치 벽돌처럼 부드러운 이미지를 연출한다. 성곽의 내부는 폐허가 되어 벽체 하부만 남았다. 중정형 건물과 분수, 수영장, 수세식 변소 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비록 폐허가 된 터만 남았지만, 알카사바는 무어왕조의 전설적 서사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벨라 탑 위에서 바라보는 알 함브라 궁전과 알바이신 지구, 그리고 멀리 시에라 네바다 설봉은 감동적인 장관이다. 탑 입구에 새겨진 시 구절에 ‘그라나다의 맹인보다 가련한 사람은 없다’라는 표현이 공감할 만하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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