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 건축가 가우디의 시대적 걸작
발칙한 상상력과 예술적인 감각 바탕
40여년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대표작
스페인의 문화적, 예술적 원천으로
관광객 발길 끊이지않는 세계적 명소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의 여파는 바르셀로나를 탐욕과 타락이 난무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급격히 줄어들고, 극단적 사회주의자들은 교회를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출판사 사장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보카베야(Josep Maria Bocabella)는 속죄와 회개의 뜻으로 성당을 건립코자 했다. 그는 역시 독실한 신자였던 가우디에게 그 일을 담당할 수석건축가의 임무를 맡겼다.

가우디는 이 작품을 위임받은 1883년 이래 1926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40여년간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오로지 한 작품에 40년을 매달릴 수 있는 건축가는 거의 없다. 열성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설계안의 4분의1 정도 밖에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반평생을 바쳐도 완공하지 못할 만큼 그를 집요하게 매달리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신의 계시를 받았거나 투철한 종교적 신념, 또는 완벽을 추구하는 결벽증 등을 제외한다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가우디의 대표작으로 추앙받는다. 비유컨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그가 남긴 음악적 성취의 절정을 보여준다면,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교향곡 9번 중에서도 4악장 같은 정점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최후의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추구하고 시도했던 모든 건축적, 예술적 언어들이 이 작품에 종합적으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성당의 기본 골격은 고딕건축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양식적 기준일 뿐 가우디는 독창적인 해석과 표현 방법을 탐구하고 적용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건축에 담으려고 하는 그의 신앙적 주제였다. 타락한 도시 안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 부활을 선포하는 외침을 건축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것은 건축주의 의도에 부응하는 디자인인 동시에 아마도 가우디 본인의 신앙고백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건물 외곽 부분에 고딕의 버트레스와 같은 12개의 첨탑을 구상했다. 이는 12사도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중앙탑 주변의 4개의 탑은 4 복음사가(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상징이며, 중앙 탑은 당연히 예수를 상징한다. 170m에 이르는 거대한 탑 높이로 그 위상을 표현했다. 앱스 부분의 돔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니, 가히 성가정(Sagrada Familia)이라는 주제의 인물들이 총출연한 셈이다. 그 배치는 마치 신약성서의 주요 인물로 구성된 세계를 만다라로 표현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 바르셀로나 성 가족 성당.
▲ 바르셀로나 성 가족 성당.

파사드의 구성은 보다 더 노골적이다. 성당 3면에 파사드를 조성했는데, 각각 탄생의 파사드, 수난의 파사드, 영광의 파사드라는 주제로 부조를 조각했다. 그 중 가우디가 직접 완성한 것은 탄생의 파사드 하나 뿐이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기베르티(Chibert)가 피렌체 두오모 세례당에 남긴 ‘천국의 문’처럼 시대적 걸작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벽면 가득 울창한 숲속에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하늘의 천사들과 동방박사들의 부조가 성스럽게 펼쳐진다.

수난의 파사드는 가우디 사후 1954년 현대 조각가의 디자인으로 조성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가우디가 남긴 도면과 설계지침이 적용되었다. “단단한 골조가 드러나 마치 뼈로 만든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지침에 따라 추상적이고 정형화된 직선 위주의 형상으로 표현했다. 수난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을 준다. 탄생의 파사드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작품이다.

성당 안은 외관의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평면은 고딕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인 라틴 십자가형이다. 중앙에 3랑식 네이브를 두어 예배석으로 하고, 양 측면에 회랑을 설치하며, 십자 평면의 정점에 반원형 앱스를 설치한 것도 고딕건 축의 통상적 방식이다. 하지만 늘씬한 기둥들이 중간에서 가지를 뻗어 45m 높이의 천정을 받치는 모습은 고딕의 전통적 규범을 벗어나는 장관이다. 침묵과 경건을 강요하는 고딕건축의 위압감이나 중량감은 사라지고, 시원하며 장쾌한데 신비롭기까지 하다.

성당 내부는 그야말로 수 많은 나무들이 울창한 ‘성스러운 숲’이다. 모든 기둥은 나뭇가지처럼 줄기로 갈라져 천정을 지탱한다. 볼트구조로서의 역학적 기능들은 나뭇가지의 형상화 속에 감추어진다. 어느 구석에서도 직선을 발견할 수 없다. 천정의 볼트는 아치가 아니라 현수선이다. 가우디는 실에 추를 달아 늘어진 역학적 곡선을 디자인에 응용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하늘의 빛이 들어온다. 스테인드 글래스를 통해 여과된 빛은 신비로운 색광으로 공간을 감싼다. 동쪽과 서쪽의 색상을 다르게 사용해 오전과 오후의 색광이 시간에 따라 다르게 투사된다. 고전주의 건축들이 측면 창호만을 통해 빛을 받았다면, 이곳은 천정과 클리어 스토리에서도 수많은 빛 우물을 두었다. 이로써 어둡고 엄숙한 ‘하느님의 집’이 아니라 밝고 즐거운 ‘하느님 백성의 집’을 만들어 냈다.

가우디의 천재성은 결코 시대와 사회와 공간을 초월하는 개인적인 특출성이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오래 축적된 유럽 고전주의의 양식적 방법과 무어 혈통의 화려한 장식적 기법이 내재돼 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유전자를 가졌더라도 ‘발칙한 상상력’과 ‘예술적 감각’이 없었더라면 결코 가우디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와 같은 유전자는 피카소와 달리에게도 이어지는 스페인의 문화적, 예술적 원천이 아닐까.

언젠가 관광객이 아닌 시민의 입장으로 여길 다시 와보고 싶다. 괴기스러운 아케이드에서 빗소리도 들어보고, 공원 가득 내리는 안개도 보고 싶다. 평범한 일요일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가족을 위한 미사를 드리고 싶다.

이러한 장소를 일상적 생활공간으로 향유하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부럽기만 하다. 천재적인 건축가 하나로 그 도시의 후손들이 대대로 먹고 살 수 있다면, 미래를 위한 사회적 투자 중에서 건축가를 기르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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