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창호 극작가

목련이 피기 시작하던 봄날. 화랑이던 효종랑은 봄맞이 야유회를 남산 포석정에서 열었지. 젊은 화랑들이 모두 약속시간에 오는데 두 사람이 늦게 오거든.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두 화랑이 말했어.

분황사 동쪽 마을에서 스무 살쯤 된 한 여자를 봤습니다. 여자가 눈먼 어머니를 껴안고 목 놓아 울기에 마을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었지요. 마을사람이 그러데요. 여자의 집이 가난해서 구걸해 얻은 쌀로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올핸 흉년이 들어 걸식하기도 어려웠답니다. 할 수 없이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 받은 곡식을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했지요. 날이 저물면 쌀을 가지고 집에 와서 밥을 지어 어머니와 같이 먹고 잠자고 새벽엔 주인집에 가서 또 일을 하고. 며칠째 되던 날에 어머니가 말했지요. 여태 껄끄러운 밥을 먹어도 마음이 편하더니 요새 먹는 쌀밥은 창자를 찌르는 것같이 마음이 아프구나. 대체 어찌된 일이냐? 그러자 딸은 작년에 풍년이 들어 쌀이 흔해졌다고 거짓말을 했겠다. 어머니가 말했어. 내가 눈이 안 보여도 귀는 훤하다. 흉년이 들어 다들 난리라는데 이 쌀 어디서 났느냐? 딸은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랬더니 어머니가 통곡을 하는 거였습니다. 딸은 자기가 어머니의 끼니를 채우는 봉양만 하고 마음을 살피지 못했음을 탄식하여 하염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어 이렇게 늦었습니다.

효종랑은 이 말을 듣고 측은해 하여 곡식 100석을 보냈지. 한 화랑의 부모도 새 옷을 한 벌 보냈고, 많은 화랑들도 곡식 1000석을 거두어 보냈단다. 모녀의 이 기구한 사연을 알게 된 진성여왕은 곡식 500석과 집 한채를 내리고, 군사를 보내 그 집에 도둑이 들지 못하게 했지. 또 그 마을을 표창해서 효양리(孝養里)라 이름 지었고, 나중엔 그 집을 희사해서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불렀지.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느라 약속시간마저 어긴 화랑들. 여기저기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요즘하곤 다르지. 효행과 이웃 사랑은 그저 옛날이야기로만 남아 있으려나.

장창호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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