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수첩에 적힌 이름들을
새 수첩에 옮겨 적는 일로
한 해를 시작한다 늘 그랬듯이
몇몇 이름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작은 구멍들이 생기고

구멍을 빠져나온 이름들이
천천히 망각의 강을 건너는 동안
새로 나타난 이름들이
빈 구멍들을 메워 가리라

내가 수첩을 정리하는 동안
누군가의 수첩에도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을 빠져나온 내 이름이
새로운 구멍을 찾아다니리니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던 순간부터 시작된
이 무미건조한 작업이 끝나는 날
내가 돌아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그 날의 쓸쓸함을 위해, 새해여
나는 너에게 무엇을 바쳐야 하겠니
그 동안 버린 낡은 수첩들만큼이나 두꺼워진
내 얼굴을 갈고 닦는 일 말고
열심히 갈고 닦아 투명해지는 일 말고

■ 박일환 시인은
1961년 충북 청주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2년 제4회 전태일 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수상.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시 추천.

저서로 <우리말 유래사전>, 시집으로 <푸른 삼각뿔> 등이 있다.

새해에는 모두가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일로 시작한다. ‘낡은 수첩

▲ 이기철 시인
’에서 발견되는 ‘구멍’들을 망연자실 바라보기도 하고 또는 그 자리에 새로운 이름들로 메워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결국 ‘낡은 수첩들만큼이나 두꺼워진’ ‘내 얼굴’임을 금세 알아챈다. 새해에 각오를 다지며 할 일이란 ‘열심히 갈고 닦아 투명해지는’ 일상을 가꾸어 나가는 수밖엔 없다.

이기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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