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 갱신 기간이 지난 아내를 따라
범칙금을 납부하러 파주경찰서에 간 날
거기서 다시 그를 만났다
고소고발인 홍길동
민원인 홍길동
분실신고자 홍길동
사백 년째 민원인으로 혹은 그 대리인으로
그는 서류에 이름을 남기고 있었다
대출을 받으러 농협에 간 날은
거기서도 그를 만났다
원래 근본이 없는 인간이라 그런가
그는 수백 년째 그렇게 민원인으로
대출자로 고소고발자로
온갖 민 형사 사건의 주인공으로
부동산 금융 기관의 단골 대출 고객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아직도 호부호형이 문제인지
빽 없고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대명사로
그는 여전히 이름을 팔고 있었다
민원인 이름에 그를 지우고 잠시 여경의 눈치를 보다가
진시황, 이건희, 오바마, 전두환의 이름을 써본다, 써봤다.
상대가 놀란다. 그렇게 겁박해봤다. 마음속으로.

■ 이동재 시인은
경기 강화 출생. 1998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으로 <민통선 망둥어 낚시> <세상의 빈집> <포르노 배우 문상기> 등이 있다.

관공서에 가면 민원인들이 참고하라고 서식들이 놓여 있다. 그렇다. 그 서식의 주인공은 언제나 ‘홍길동’이다. 신출귀몰 의적이 버젓이 모범답안으로 제시되어 있다. 재미있

▲ 이기철 시인
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왜 하필 그일까. 이유는 자명하다. 억울한 민초들을 대변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이름을 지우고 ‘진시황, 이건희, 오바마, 전두환’의 이름으로 대치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상상을 해보라.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름’의 의미는 의미심장하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 일이다.

이기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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