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국 학성고등학교 교사

모던타임즈. 1936년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 제목이다. ‘근대의 시간’이 표현된 영화이다. 영화에는 산업사회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흑백 무성 영화라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두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하나는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끊임없이 볼트를 조이던 채플린이 기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계속 볼트를 조이던 채플린이 여성의 옷에 볼트처럼 생긴 단추를 볼트로 착각하고 여인의 가슴에 있는 단추를 조이려고 하자 여성이 당황해하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공장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는 벨트 앞에서 볼트를 조이는 일만 반복한다. 산업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된 것이다. 천재라고 찬사를 듣는 채플린의 표현력에 이제야 나는 그 천재성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화면을 가득 채운 시계 바늘이 6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배경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이라는 톱니바퀴를 따라 공장 컨베이어벨트 앞으로 가고 있다. 대량 생산을 위해 기계 앞으로 출근한다. 사람들의 일상 자체를 대량 생산 체제의 컨베이어벨트로 만들었던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다시 본 영화의 여러 장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첫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오늘 아침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컨베이어 시스템(conveyor system)은 1913년 포드자동차가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자동차 부품을 조립할 필요가 없었다. 제자리에 서서 ‘이동해 오는’ 부품들을 조립해 자동차를 만들면 됐다. 자동차 1대를 생산해내는 시간이 630분에서 93분으로 단축되었다고 한다. 생산성이 무려 7배 향상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표준화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학교는 지금 기말고사 기간이다. 본교는 지난주 시험이 끝났다. 이번 주 시험이 있는 학교도 많다. 시험문제를 푸는 아이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과 함께 순간적으로 문제에 매달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마저 답을 표기하지 못했거나 서술형 답을 작성하다가 멈추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학교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과거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나에게 허락된 공간이 작은 책상이 다였다고 느꼈던 내가 보인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있어야 하는 모습으로’ 존재했어야 했던 ‘학생’이라는 신분의 나는 외로웠다. 학교에는 ‘나’를 만나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사회에 필요한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는 압력을 아이들이 느끼지 않을까? 시험을 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생각이 겹친다.

학교에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없기도 하다. 컨베이어벨트 위에 아이들을 세워서는 안 된다. 학교는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찾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할 것이다.

이현국 학성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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