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걸수 수필가

며칠 전 소문난 추어탕 집을 찾았다. 식당 입구에는 삶은 시래기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붉은 통에는 미꾸라지들이 파닥거려 생동감이 넘치고 있었다. 건장한 중년 남자는 푹 삶은 미꾸라지를 방망이로 뭉개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식당 안은 비좁고 북적거렸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추어탕이 바로 나왔다.

순간 그 옛날 부모님과 우리 4남매가 멍석 위 원탁 둘레 판에 앉아 호호 불어가며 먹었던 추어탕 그 맛이었다. 어릴 적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이때쯤이었을까 노란 양철 주전자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지금은 폐교가 된 초등학교 아래 ‘강도앞에’ 라는 우리 논이 있었다.

논과 차도 사이 경사진 농수로에 작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그 시절 그곳은 아버지만의 어장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쇄 죽 퍼줄 때 쓰는 낡은 나무 바가지로 물을 퍼내자 바닥이 보였다. 요즘 말로 고기 반 물 반인 미꾸라지들이 파다닥 거렸다.

내 작은 고사리손으로 미꾸라지를 주전자에 담으려 했던 기억들이 살아난다. 지나고 보니 추억 속 아버지와 스토리가 담긴 몇 안 되는 서사였다.

필자는 어릴 적부터 추어탕을 좋아했다. 청도추어탕, 남원추어탕도 다를 특이한 맛이 있지만, 아버지가 직접 잡은 노란 미꾸라지로 어머니가 끓인 추어탕에 산초가루를 넣은 싸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팔딱거리는 미꾸라지를 큰 다랑이에 부어 소금을 뿌린다. 미꾸라지는 하얀 거품을 품어 내며 소동을 부리다 서서히 생명을 다한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면서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머니는 푸른색을 띤 금방 삶은 시래기를 듬뿍 넣어 추어탕을 끓인다. 가마솥에서는 부럭부럭 김새는 소리와 함께 추어탕 냄새가 솔솔 풍긴다.

우리 가족들은 큰 사발에 밥을 추어탕에 말아 먹는다. 그때마다 엄마는 나를 보며 왜 밥만 건져 먹나 국물도 건지기도 함께 먹으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래도 나는 맛에 취해 흥얼거리며 맛있게 먹었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비가 갠 날이면,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도랑에 싸리 소쿠리를 대 놓고 온 힘을 다해 ‘어쏴 어쏴’ 하며 발을 동 동 굴렸다. 비가 내리는 장마 때에는 미꾸라지들이 꼬물거리며 길 위로 올라오기도 했지, 어릴 적 실개천에서 미꾸라지 잡는 일들은 우리들의 일상이었고 신나는 놀이였다.

여름의 끝자락 처서가 지나면 집집마다 벌초를 한다. 어머니는 점심시간에 맞춰 추어탕을 가득 끓인다. 오전에 조상 묘 벌초를 마치면 점심은 항상 어머니 표 추어탕이었다. 멀리서 객지에서 온 사촌 형제들과 먹는 추어탕은 정말 일품이었다. 이제 부모님 세대들은 다 떠나시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홀로 4남매를 키우셨고, 말년에는 대퇴부 연골이 낡아 통증 때문에 뼈주사 맞으며 고생하다 우리 곁을 떠나셨다. 어머니 가신지가 올해로 10년째다. 어머니 살아생전 이맘때 고향 집에 가면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면서도 어김없이 추어탕을 끓여주셨다.

필자는 가까이 사는 형과 맛있게 먹어만 줘도 효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생각에 아픈 통증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추어탕은 소화가 금방 된다며 조금 있다. 한 그릇 더 먹고 “자고 가거래이”라고 하시던 말이 내 가슴을 도려낸다.

강걸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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