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이다. 한계를 많이 생각했던 젊은 날에 비해 삶에 대한 관조의 깊이가 달라졌음이다. 한계는 도전과 어울리는 낱말인 반면 사이는 관계와 어울린다. 두 대상의 사이에 끼게 되는 조사 ‘와’나 ‘과’에 무게를 두기도 한다. 받침이 없는 낱말 다음에 오는 ‘와’가 왠지 부드러운 느낌이다. 그다지 연관성이 없음에도 조사의 쓰임에 따라 사이의 돈독함이나 간격의 적절성을 가늠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 읽은 한 권의 수필집이 갖게 한 생각이다.
<사이에 대하여>(최민자/연암서가)는 저자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묶은 수필집이다. 지금껏 읽던 수필과는 확연히 다른데 그 낯섦이 오히려 익숙하다. 즉각적 소통을 생명으로 하는 SNS의 특성을 고백한 저자의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수필은 정제된 언어와 절제된 문체가 특징이다. 생소한 낱말들을 찾아서 적절하게 배치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그래서일까, 전작들이 지나치게 고품격이었다면 이 책은 조금은 다르게 읽힌다. 그렇다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 따위를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술한 산문 형식의 글이라는 것이 수필의 정의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이야 말로 그 정의에 가까운 듯하다. 200자 원고지 15매 가량이라는 일반적인 분량부터 허문 작품들에 한결 정감이 간다. 5매 수필에 가까운 것이 대부분이다. 어떤 것은 시 한 편보다 짧기도 하다. 그런 작품일수록 잠언처럼 읽히는 것은 작품의 무게 때문이다. 작품들의 주제가 선명해서 허투루 읽기에는 미안해진다. 쉽게 읽어 넘기기에도 아까운 메시지가 담겨 있다. 가볍지는 않으나 무겁지도 않은 ‘나이에 대하여’를 ‘하필’ 새겨 읽을 건 무어람?
언젠가부터 세상이 사막화된 느낌이다. 코로나19로 최소한의 외출만 하다 보니 사람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탓이다. 가볍고 달뜬 말이 오가던 공간은 무거운 침묵에 짓눌렸다. 표정 없는 문자들로 오해도 생겨나는 요즘. 이래저래 마음에도 종종 모래바람이 인다. 그렇지만 모여 앉아 있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라는 ‘모래 울음’이 위안이 된다. ‘함께’하되 스스로 치유하지 않으면 이웃까지 상하게 하는 ‘상처’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래저래 한 권의 수필집으로 섬유화된 마음이 한결 말랑해졌다. 장세련 아동문학가